평양성 전투 (371년)
371년 겨울 백제 근초고왕과 태자 근구수가 정예 3만으로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한 전투. 성을 지키던 고구려 고국원왕이 화살에 맞아 10월 23일 죽었으며, 백제는 성을 빼앗지는 못하고 물러나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
시작~종료 371년 ~ 371년 10월 23일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상세 타임라인
개요
평양성 전투는 371년(백제 근초고왕 26, 고구려 고국원왕 41) 겨울, 백제군이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한 싸움이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날아온 화살(流矢)에 맞아 죽었다. 한국사에서 왕이 적국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드문 사례이며, 백제 근초고왕의 북진이 정점에 이른 사건이다. 그러나 백제는 평양성을 차지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날짜는 음력이다(고국원왕의 사망일 10월 23일). 지도 표지는 평양에 두었다. 당시 평양성의 정확한 위치는 아래 '이설'을 참고.
배경
고구려는 342년 모용황의 고구려 침입 이후 남쪽으로 눈을 돌려 334년 증축한 평양성을 거점으로 옛 대방 지역 진출을 꾀했다. 369년 고국원왕이 2만 군으로 남하했다가 치양 전투에서 백제 태자 근구수에게 5천여 명을 잃었다. 고구려는 패배를 만회하려 했고, 백제는 고구려를 더 북쪽으로 밀어내려 했다.
전개
패하의 매복전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26년조에 따르면 그해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근초고왕은 이 소식을 듣고 패하(浿河) 가에 군사를 숨겨 두었다가, 고구려군이 이르기를 기다려 급히 공격했고 고구려군은 패하여 달아났다. 고구려본기에는 이 싸움이 나오지 않는다.
평양성 공격
같은 해 겨울, 근초고왕은 태자와 함께 정예병 3만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쳐들어가 평양성을 공격했다. 고구려본기는 이를 "41년 겨울 10월, 백제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와서 평양성을 공격했다"고 적었다.
고국원왕의 전사
고국원왕은 군사를 내어 맞서 싸웠다. 백제본기는 "고구려왕 사유가 힘껏 싸워 막다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했고, 고구려본기는 "왕이 군사를 내어 막다가 날아온 화살에 맞았다. 이달 23일 돌아가셨다. 고국(故國)의 들에 장사 지냈다"고 적었다. 고국원왕(故國原王)이라는 시호는 이 장지에서 나왔다.
백제군의 철수와 한산 이도
고국원왕이 죽었지만 고구려는 평양성을 지켜 냈다. 근초고왕은 군을 이끌고 물러났고, 돌아와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겼다(移都漢山).
결과
- 백제: 옛 대방 지역 대부분을 차지해 북쪽 경계를 황해도 신계의 수곡성 일대까지 넓혔다. 근초고왕은 이듬해인 372년 정월 동진에 사신을 보내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 고구려: 고국원왕의 아들 소수림왕이 즉위하여 위기 수습에 나섰다. 그는 372년 불교를 받아들이고 태학을 세웠으며, 373년 율령을 반포해 체제를 정비했다. 군사적으로도 반격하여 375년 백제의 수곡성을 함락했다.
- 이어진 공방: 376년 고구려가 백제 북쪽 변경을 쳤고, 377년 10월 근구수왕이 3만 군으로 다시 평양성을 공격했으며, 11월 고구려가 백제를 쳤다. 두 나라의 대립은 광개토왕·장수왕 대까지 이어졌다.
영향과 의의
이 전투는 4세기 후반 한반도의 세력 판도를 바꾸었다. 백제는 일시적으로 한반도 서부의 최강국이 되었지만, 왕을 잃은 고구려의 원한은 깊었다. 472년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 "(선조가) 쇠(釗, 고국원왕)의 머리를 베어 매달았다"고 자랑한 것은 이 승리가 백제 왕실의 기억 속에 오래 남았음을 보여 준다. 김부식은 이를 "지나친 말(過辭)"이라고 주석했다. 고구려 측의 복수심은 광개토왕의 396년 백제 정벌과 장수왕의 475년 한성 함락으로 이어졌다고 평가된다.
이설·논쟁
- 평양성의 위치: 일반적으로 대동강 유역의 평양으로 본다. 다만 고국원왕이 343년 옮겨 머문 '평양 동황성'의 위치에 대한 논란과 맞물려, 이 평양성을 황해도 재령·신원 일대의 '남평양'으로 보거나 다른 곳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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