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양 전투
369년 9월 고구려 고국원왕이 보병·기병 2만으로 백제의 치양(황해도 배천 일대)에 진을 치고 민가를 약탈하자, 백제 태자 근구수가 급습하여 5천여 명을 벤 전투. 고구려와 백제의 첫 대규모 충돌이다.
시작 369년 9월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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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치양(雉壤) 전투는 369년(고구려 고국원왕 39, 백제 근초고왕 24) 가을 9월(날짜는 음력)에 벌어진 고구려와 백제의 싸움이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두 나라의 첫 대규모 군사 충돌로, 백제가 크게 이겼다. 2년 뒤 평양성 전투로 이어지는 고구려·백제 전쟁의 시작이었다.
지도 표지는 치양으로 비정되는 황해남도 배천 일대에 두었다(위치는 대략적이다).
배경
낙랑·대방군이 사라진 뒤 옛 대방 지역(황해도 일대)은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완충 지대가 되었다. 고구려는 334년 평양성을 증축해 남진의 거점으로 삼았고, 342년 모용황의 고구려 침입으로 서방 진출이 막히자 남쪽에 힘을 기울였다. 백제 역시 근초고왕 즉위 뒤 왕권을 강화하고 신라와 우호를 맺으며 북쪽으로 세력을 넓히려 하고 있었다.
전개
고구려군의 남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고국원왕 39년 가을 9월 "왕이 군사 2만으로 남쪽 백제를 쳐서 치양에서 싸웠으나 패했다"고 짧게 적었다. 백제본기는 더 자세하다. "고구려왕 사유(斯由, 고국원왕)가 보병과 기병 2만을 거느리고 와서 치양에 주둔하고,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침탈했다."
태자 근구수의 급습
근초고왕은 태자(뒤의 근구수왕)를 보냈다. 태자는 군사를 이끌고 지름길로 곧장 치양에 이르러 급히 쳐서 깨뜨렸고, 5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사로잡은 포로와 노획물은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고구려군이 병력을 나누어 약탈하던 중이었다는 점이 백제의 기습이 성공한 원인으로 보인다.
한수 남쪽의 대열병
그해 겨울 11월 백제는 한수(漢水, 한강) 남쪽에서 대규모 열병을 했는데, 깃발을 모두 황색으로 썼다. 황색은 오행에서 중앙을 뜻하는 색으로, 근초고왕이 승리를 과시하며 왕권의 위엄을 드러내려 한 의례로 해석된다.
결과와 영향
- 백제는 고구려의 남진을 처음으로 꺾고 황해도 방면으로 진출할 발판을 얻었다.
- 고구려는 371년 다시 백제를 쳤으나 패하(浿河)에서 매복에 걸려 패했고, 그해 겨울 백제의 반격으로 평양성에서 고국원왕이 전사했다.
- 치양 전투의 경험은 태자 근구수를 백제의 주요 군사 지휘자로 부각시켰다. 그는 375년 즉위한 뒤에도 377년 3만 군을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하는 등 고구려와 계속 싸웠다.
- 『일본서기』 신공기의 369년 무렵 기사와 이소노카미 신궁의 칠지도 명문(태화 4년, 369)을 근초고왕 대의 대외 활동과 연결해 보는 견해에서는, 369년이 백제가 남북으로 동시에 세력을 넓힌 해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설·논쟁
- 치양의 위치: 황해도 배천(백천)으로 보는 견해가 통설이다.
- 병력과 전과: 고구려 2만, 백제의 전과 5천여 급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수치이며 다른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고구려본기는 패배 사실만 적었다.
참고 자료
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 r78 · 문서 내용은 CC BY-SA 4.0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