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국번
증국번(중국어 간체자: 曾国藩, 정체자: 曾國藩, 병음: Zēng Guófān 쩡궈판[*], 1811년 11월 26일 ~ 1872년 3월 12일)은 청나라 말기의 군인, 정치가·학자이다. 본명은 자성(子城)이고, 자는 백함(伯函), 호는 척생(滌生)이며, 사후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하사되었다. 약체화된 청나라 조정의 군대를 대신해 상군을 조직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했고, 양무 운동에도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홍장, 좌종당 등 청나라 말기의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출생~사망 1811년 11월 26일 ~ 1872년 3월 12일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후 2:08
증국번(중국어 간체자: 曾国藩, 정체자: 曾國藩, 병음: Zēng Guófān 쩡궈판[*], 1811년 11월 26일 ~ 1872년 3월 12일)은 청나라 말기의 군인, 정치가·학자이다. 본명은 자성(子城)이고, 자는 백함(伯函), 호는 척생(滌生)이며, 사후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하사되었다. 약체화된 청나라 조정의 군대를 대신해 상군을 조직하여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했고, 양무 운동에도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홍장, 좌종당 등 청나라 말기의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생애
1811년(가경 16년), 후난성 상향현(현재는 쌍봉현)에서 증린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증자의 70세손) 1838년(도광 18년)에 진사에 합격하여 중앙 관청의 여러 직책을 역임했다.
1852년(함풍 2년), 예부우시랑 재직 중에 어머니의 사망으로 상을 치르기 위해 귀향했다. 전년인 1851년(함풍 원년)에 태평천국의 난이 발발하여, 청나라 정규군인 팔기군이 진압에 나섰지만, 연전연패했다. 팔기군은 대를 이어 내려오면서 귀족화되어 약화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청나라 정부는 각지의 향신들에게 향용이라는 임시군의 징집을 명령했다. 명령을 받은 증국번은 여러 단련을 정리하여 향용을 조직했다. 이것이 상군이었으며 힘을 발휘하여 궁극적으로 태평천국군에게 승리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1854년(함풍 4년), 상군은 무창을 수복했지만, 군기대신 기준조가 상군을 위험성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기 때문에 병부시랑의 대우만 받았을 뿐이었다. 1855년, 태평천국군의 공격을 받아 무창이 함락된 후 남창에서 1년동안 매달리며 상군을 재건했다. 1857년, 부친이 사망했지만, 비상시(奪情起復)였기 때문에, 상복을 입지 않았다.
1858년, 상군은 구강을, 1860년에는 안경을 포위했고, 이듬해 1861년에 함락시켰다. 같은 해 조정은 증국번에 대해 우려를 표했지만, 정부군으로서도 다른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호부상서 숙순은 증국번을 양강총독과 흠차대신으로 추천했다. 또한, 강소성이 상해를 제외하고는 모두 태평천국에 점령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원병으로 부하인 이홍장을 안휘성에 파견했다. 이홍장은 그곳에서 증국번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단련을 바탕으로 을 조직하여 을 만들고 1862년(동치 원년)에 상해로 가서 태평천국과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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