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친왕(義親王, 1877년 3월 30일 ~ 1955년 8월 16일)의 이름은 이강(李堈)으로 고종의 별자(別子)이다. 모친은 명성태황후이고 사친은 귀인 장씨이다.
개요
의친왕 이강은 을미사변의 배후에 운현궁 일가가 있을 것으로 의심하고 복수를 계획하던 중 생조부 헌의대원왕(흥선대원군)에게 발각되었고, 이를 계기로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부친 고종은 의친왕의 안전·장래·학업·지인·인품 등을 우려하여 미국 유학을 보내게 되었다. 궁가 사동궁은 개인 채무로 인해 한동안 대한제국 정부가 소유자였다. 혁명혈약서 사건·박영효 일파·이토 히로부미 등과 관련된 역모 사건에 자기 의사와 관계없이 연루되었다.
한일강제병합 공포 이후 일제의 조서에 의해 공족이 되어 공(公) 작위를 받았고, 은사공채(은사금)도 받게 되었다. 《일본의 조선》에 「양국은 칠에 아교를 넣은 듯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친필을 게재하였다.1 고종이 사망한 당년 친필로 독립성명문을 작성하였고, 대동단 제2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망명을 시도하던 중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서울로 강제 송환되었다. 다만 신문조서를 받을 때 이에 대해 부정했다고 기록되었다. 이후 여러 염문설로 인해 궁내성이 이강의 공(公) 작위 은거를 검토하게 되었고, 이강은 지병을 이유로 서장자 이건에게 세습하고 은거하였다.
광복 이후 애국협회 회장에 추대되었다. 사동궁이 적산 취급을 당한다는 잘못된 정보로 인해 헐값에 매각하였다. 6·25 전쟁을 겪었다.
생애
어린 시절
출생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은 1877년(고종 14) 양력 3월 30일 서종조모 숙의 범씨의 제택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고종이고 모친은 명성태황후이며 사친은 귀인 장씨이다.
의화군 봉작·길례
왕세자가 태어난 후 왕자군이 태어나면 왕세자가 만 10세가 되기 전까지 왕자군이 입궁하여 문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궁중 법도로 인하여, 이강은 궁 밖에서 서종고숙(庶從姑叔) 금릉위 박영효의 양자처럼 양육되었다. 1884년(고종 22) 명성황후가 이강의 궁중 출입 허가와 군(君) 봉작을 추진했지만, 생조부 헌의대원왕(흥선대원군)이 고종의 양모 신정익황후에게 종용하여 명성황후의 계획은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이강은 흥선대원군을 원망하였다. 이후에도 군(君) 봉작을 받지 못하고 궁궐 밖 사친의 집에서 지내자 불만을 갖게 되었고, 시중의 무뢰한과 소행을 난잡하게 하기도 하였다.2 1891년(고종 28) 음력 12월 의화군(義和君)으로 봉해졌다.3
1893년(고종 30) 음력 10월 연원군부인 김덕수와 안동별궁에서 길례(혼인)를 올렸다.4 1894년(고종 31) 내의원·사옹원 제조, 영돈녕부사에 임명되었다. 또한 보빙대사(報聘大使)로 임명되어 청일전쟁의 일본 승리 축하 및 조선과 일본의 우호 관계를 증진할 목적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1895년(고종 32) 이탈리아 움베르토 1세의 질남(姪男) 아부리(阿夫里·아브루치 공작)를 전송하였다.5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 특파대사(特派大使)로 임명되었지만6 두 달 뒤 의원면직 하였다.78
을미사변 목격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 당일 의화군은 고종의 명을 받고 경복궁 밖의 동태를 살폈다. 조선군 훈련대는 건춘문과 춘생문, 일본 군인들은 영추문으로 가는 것을 목격하였고 이어서 을미사변이 발생하였다. 그날 오후 1시 의화군은 윤치호에게 참상을 전하였다. 이후 생조부 흥선대원군이 두려워서 나흘 동안 언더우드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9
일본 유학
계기
의화군은 을미사변의 배후에 생백부 이재면(흥친왕)과 생종형 이준용(영선군)이 있을 것으로 의심하고 조선 검객·일본 낭인·청나라 세력인 등을 모아 복수를 계획하였는데, 곧 흥선대원군에게 발각되었다.10 이는 의화군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11
게이오 의숙 재학·미국 방문
1896년(고종 33) 게이오 의숙을 다녔다. 당시 도쿄에서 3,000원의 빚을 지게 되었는데, 1895년(고종 32) 총리대신 연봉이 5,000원이었다.12 7월 도쿄에서 고베(神戶) 근처로 피서를 다녀왔다.13 1897년(고종 34) 요코하마(橫濱)에서 미국으로 갔다. 의화군은 서광범과 교류하였고14 9월 민영환·박승봉과 함께 서광범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15 1898년(고종 35) 일본을 경유해서16 귀국하였다.17
고종의 미국 유학 결정
고종은 의화군이 일본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첫째, 의화군이 금릉위 박영효·유길준·민상호 등과 교류하는 것을 싫어하였다.18 박영효는 갑신정변 주동자이자 제2차 갑오개혁 추진자이며, 명성황후 암살 모의자로 지목되어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유길준은 을미사변 가담자로 지목되어 망명하였다. 민상호는 춘생문 사건에 연루되었고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둘째, 의화군이 학업을 게을리하는 것을 우려하였다. 셋째, 젊어서 사려가 충분하지 않으므로 어떤 사고를 일으킬지 헤아리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19 결국 고종은 의화군의 학업·안전·장래를 위해 미국 유학을 결정하였다.20
미국 유학
의왕(義王) 책봉
1899년(고종 38) 미국 유학을 떠났다. 1900년(고종 39) 8월 의왕(義王)으로 책봉되었고 금책(金冊)·금인(金印)·칠장복(七章服)을 하사 받았다.21 칭호는 의왕(義王) 또는 의친왕(義親王)이라 하였다.
박영효의 의친왕 옹립 음모 사건
박영효·이겸제·김창한·이승린(李承麟)·이조현(李祖鉉)·윤석준(尹錫準) 등은 활빈당(活貧黨)을 조직하고 경상도에서 금 50만 원을 모아 일본에서 무기를 구입하고 의친왕을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22 하지만 1900년(고종 39) 발각되었고23 박영효 세력은 사망 및 분열되었다. 1907년(고종 46) 이승린·이조현·박영효·김창한·이겸제·윤석준 등이 사면받았다.24
혁명혈약서(革命血約書) 사건
조택현·장호익·김홍진·권호선 등은 고종과 순종을 폐위하고 의친왕을 옹립하여 새 정부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중략)…『우리나라가 망할 날이 조석(朝夕) 간에 달려 있건만 전혀 막아낼 대책이 없으니 …(중략)… 지금 마땅히 맹약(盟約)을 정하여 나라를 붙들어 세워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중략)… 제목을 ‘혁명혈약서(革命血約書)’라고 달았는데, 그 중의 조건은, 첫째, 대황제 폐하를 폐위한다는 것이고, 둘째, 황태자 전하를 폐위한다는 것이고, 셋째, 의친왕(義親王)을 그 자리에 대신 올려 앉힌다는 것이고, …(중략)… 광무(光武) 4년 월일을 밝힌 아래에 맨 먼저 조택현(趙宅顯)을 쓰고 그 다음에는 장호익(張浩翼)·김홍진(金鴻鎭)·권호선(權浩善)·강용구(姜容九)·방영주(方泳柱)·장인근(張寅根)·이기옥(李基鈺)·권승록(權承祿)·김희선(金羲善)·김형섭(金亨燮)·김교선(金敎先)·김봉석(金鳳錫)·김홍남(金鴻南)·김관현(金寬鉉)을 써서 15인의 이름을 같이 열거하였으며 도장을 찍었습니다. …(중략)…25
권호선은 감옥에서 병사하였다. 1904년(고종 43) 평리원의 재판 결과 장호익·조택현·김형섭·김희선·김교선·방영주·김홍진·김영소는 참형되었다.26
로노크 대학교·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재학
1901년(고종 40) 로노크 대학교에서 김규식을 동창으로 만났다. 6월 의친왕은 김규식·수행원 등과 매사추세츠주 노스필드에서 열린 학생 대회에 참여하였다.27 로노크 대학교를 마치고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재학 중 김란사와 교류하였다.28 그러던 중 의친왕이 조셉 스타우트(Joseph Stout)에게 구타를 당한 일과 거주하는 아파트에서 복면강도를 당하여29 하와이·샌프란시스코 등지로 가서 수학하였다. 하지만 학업·실덕·부채 등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3만 달러 부채 기록
의친왕은 미국 유학 중 빚을 지게 되면서 대한제국 정부와 사업을 하고 있는 미국회사를 통해 수당을 받게 되었는데, 수당은 250달러로 늘어났고 증권을 하게 되었다. 1902년(고종 41) 고종 앞으로 3만 달러 어음이 발급되었고 부채상환 소송을 통보받게 되었다.30
대한제국 귀국 전 일본 체재
의친왕의 귀국 희망·고종의 귀국 불허
1905년(고종 42) 부친 고종은 의친왕이 일본과 미국에서 학업에 매진하지 못하고 품행이 단정하지 않은 점을 우려하였고, 바른 인품을 갖추기를 바랐다.31 다만 의친왕이 귀국하면 이재면(흥친왕)·이준용(영선군) 등과의 충돌을 예측하기 어려우므로 일본 또는 미국 유학이 몇 년 더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32 반면 의친왕은 1905년(고종 42) 1월 대한제국 궁내부로 귀국과 관련된 전보를 보내고33 2월 동경에 도착하였다.34 고종은 의친왕이 미국과 일본 중에서 계속 유학을 해야하므로 귀국은 불가하다고 하였다.35 이에 의친왕은 미국 유학을 희망하고36 미국으로 떠났다.37 8월 다시 일본 동경에 도착하였다.38 이때 고종은 의친왕을 귀국시키고자 하였으나, 대한제국의 새 내각이 정비되지 못 한 상황에서 귀국할 경우 의친왕의 정치적 안전이 염려되어 귀국 허가를 연기하였다.39
갑산 구리광산 매매계약서 사본 기록
1905년(고종 42) 4월 주차일본공사관 참서관 한치유(韓致愈)40가 윤치호에게 의친왕이 갑산 구리광산 300만 평을 일본인에게 100만 엔에 매각하려 한다고 전하며 계약서 사본을 보여주었다. 내용은 의친왕이 선금 10만 엔을 받았고 잔금 90만 엔은 30만 엔씩 3차례 나눠 받을 예정이나, 만약 계약 파기 시 의친왕이 100만 엔을 보상해야 하고 대한제국 정부와 영업권 소유자 사이의 모든 소송 비용도 지급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갑산 구리 광산 300만 평 매수 예정자 일본인은 영국 회사에 매각을 시도했다고 전달하였다.41
이외에도 한치유는 의친왕이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 조민희42에게 제일은행에서 1만 엔을 빌릴 수 있도록 보증을 서 달라고 부탁했다고 하였다. 이에 조민희는 일단 수락하였지만, 차후 제일은행에 가서 자신을 보증인으로 세우는 것을 거절해 달라고 비밀리에 요구했다고 하였다.
조국의 미래 걱정
1905년(고종 42) 10월 의친왕은 윤치호를 만나서 대한제국의 상황을 걱정하고 매국 관료에 대해 비난하였다.43
대한제국 귀국 이후
귀국
1906년(고종 43) 3월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에게 의친왕의 귀국에 대해 말하자, 고종은 숙고한 뒤 결정하겠다고 하였다.44 1906년(고종 43) 4월 의친왕이 귀국하였다.45 고종은 이근명에게 의친왕이 무사히 돌아와 기쁘고 다행스럽다고 하였다.46
1906년 활동
1906년(고종 43) 4월 대한제국 육군 부장(陸軍 副將)에 임용되었고, 대훈위 금척대수장(大勳位金尺大綬勳章)을 수여받았다.47 7월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하였다.48 동월 흥인지문 밖으로 유람49과 유연(遊宴·자연 속을 유람하는 연회)을 다녀왔다.50 9월 고종의 명을 받고 일본 관병식(觀兵式)에 참석하였고51 일본제국으로부터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勳一等 旭日桐花大綬章)을 수여받았다.52 10월 의친왕은 고종에게 순종이 순정효황후(사시)와 가례를 올리기 전에 먼저 황후를 정립하는 것이 예법에 알맞다고 하였다.53
사동궁 소유자 대한제국 정부
1906년(고종 43) 의친왕의 궁가 사동궁(寺洞宮)이 설립되었다. 하지만 의친왕의 개인 채무로 인해 채권자로부터 사동궁을 차압당할 우려가 있으므로, 소유자는 대한제국 정부였다.
…(중략)…
이토 히로부미:
동궁이 일본 체재 중에 여러 곳에서 거액의 부채를 지게 되어 마침내 우리나라 법정에 제소되기에 이를지도 모를 상태에 있다고 하오. …(중략)… 거주하시는 가옥과 같은 것도 이대로 정부에서 의화궁(義和宮)에게 대여해 두는 편이 좋을 것이오. 왜냐하면 이를 의친왕(義親王)의 명의로 바꾼다면 즉시 채권자로부터 차압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오.
민영기:
앞서 의친왕(義親王)이 폐하를 알현하셨을 때 그 집은 정부 소유로 그는 소위 집을 임대하고 있는 신분이므로 매우 거북한 신세라고 말한 적이 있소. …(중략)… 지난날에도 동저(同邸)에 비로 새는 곳이 있었는데 전하는 사람을 나에게 보내시어 정부의 집이므로 즉시 정부에서 이를 수선하라고 명령하셨소. …(중략)…
이토 히로부미:
지난날에도 의화궁에게 500원의 채권이 있는 일본인이 있어 이곳으로 와서 동궁에게 상환을 청구했지만 빚을 갚지 않으므로 우리 이사청(理事廳)에 제소하여 이사청에서 이를 나에게 품신(稟申)하였소. 그 차용증서라는 것을 보건대 분명히 변제의 의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에는 의화궁(義和宮) 저택을 인도할 것이라는 조건이 기재되어 있었소. …(중략)…54
이토히로부미의 의친왕·영선군 옹립 계획설
1907년(고종 44) 3월 의친왕은 일본에서 돌아온 뒤 대한적십자사 총재에서 해임되었다.55 6월 서모 순헌황귀비의 형(兄) 엄준원이 고종에게 통감 이토히로부미가 고종을 폐위시키고 의친왕과 영선군을 옹립할 계획이라고 하였다.
…(중략)… 엄준원(嚴俊源)이 한국 황제를 알현하고 ‘통감은 폐하를 폐하고 의화궁(義和宮)과 이준용(李埈鎔) 양 황족을 옹립할 계획이며 일본 정부 당국자도 이미 찬동을 표하여 폐위와 옹립을 불원간 결행할 것이라고 보고했다’는 내용을 상주했다고 합니다. 한국 황제는 이를 듣고 크게 공포심이 일어나 엄준원과 기타 일파 무리에게 그 선후책을 하문했더니, 엄준원의 의견으로서 그 사위인 …(중략)… 민원식이 일본을 방문한 유일한 목적은 영선군이 과연 통감의 추천에 따라 한국 황제가 될 결심을 품고 있는가 여부를 탐지하는 데 있다고 합니다.56
7월 고종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황위에서 물러나 태황제(太皇帝)가 되었고, 순종이 황위에 올랐다.
황태자로 책봉된 영친왕
1907년(순종 원년) 양력 8월 이근명·민영규·이완용·이윤용·임선준·고영희·이병무·조중응·이재곤·송병준·서정순·성기운·신기선·조충하(趙忠夏)·민병석·이중하(李重夏)·구연하(具然河) 등은 순종의 부름을 받고 덕수궁 중명전으로 모였다. 고종은 영친왕이 타고난 성품이 남달리 뛰어나고 효성과 우애가 일찍이 드러났으며, 사람들도 모두 우러러 바라보고 있으니 황태자로 세울만하다고 하였다.57 순종은 정종이 동생 태종을 왕세자로 책봉한 고사를 좇아 자신의 서제(庶弟) 영친왕을 황태자로 정하였다.58 이어서 순종은 이완용에게 조서를 쓰게 하고 김종한에게 조서를 읽게 하였다.59
《고종시대사》60는 영친왕의 황태자 책봉은 의친왕파와 영선군파의 음모를 방지하기 위해 이완용 등이 추진 한 것이라고 하였다.61
1907년 활동
1907년(고종 44) 3월 의친왕은 일본제국 가나가와현에 위치한 이토 히로부미의 사저를 방문하여, 조선 통감부 통감으로 귀임(歸任)하는 이토 히로부미를 배웅하고62 동월 귀국하였다. 4월 보육원에 금 백 원을 희사하였고63 창의문 밖에서 승마를 하였다.64 5월 의친왕은 흥인지문 안 좌룡정(坐龍亭) 근처에 위치한 민가 4채를 철거해 이주시키고, 그 터에 별장을 짓게 되었다.65 7월 경무청에 형사 상 참고 진열소(參考 陳列所)가 설치되자, 의친왕은 대한제국에서 처음 있는 뜻깊은 경사라며 금 십 원을 희사하였다.66 동월 일본으로 피서를 떠난 뒤67 12월 귀국하였다.68 귀국 다음 날 운현궁·누동궁·완평군의 사우(祠宇)에 가서 배례(拜禮)하였다.69
1908년 활동
의친왕은 1908년(순종 1) 1월 일본으로 가서70 3월에 돌아왔다.71 4월 생재종형 이지용의 정자72, 7월 탑동 승방(僧房)에서 소창(消暢·답답한 마음을 품)하였다.73 8월 의친왕은 의친왕비의 형 김성기와 함께 당시 의학생이었던 안상호에게 자선병원(慈善病院) 설립비용 3천 원, 노동야학회(勞動夜學會)에 3천 원을 희사하였다.74 9월 안암동 정자에서 소창하였다.75 10월 충청남도 직산 성환의 유지들이 의성학교(義成學校)를 설립하고 의친왕을 교장으로 추대하였다. 의친왕은 의성학교의 재정상태가 취약하다는 것을 듣고 금화 천 원을 희사하였다.76
1909년 활동
1909년(순종 3) 4월 의성학교에 장려금 5백 원을 희사하였다.77 장교 기마병들과 원승회(遠乘會)를 하였다.78 5월 동대문 밖 묘련암(妙蓮庵)에서 소창하고79 관화연(觀花宴)을 베풀었다.80 7월 동대문 밖 흥천사(興天寺)에서 기생과 풍류를 즐겼고81 8월 측실 이연연(李姸娟)과 흥천사에서 말을 타기도 하였다.82 9월 음벽정(飮碧亭)에서 소창하고83 10월 삼종조부 완평군 이승응의 장지(葬地)를 방문하였다.84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하자 통감부를 방문하여 조의를 표하였다.85 11월 안상호의 진찰소를 방문하였다.86 12월 적형 순종과 일진회의 한일합방성명서에 관한 대화를 하였다.87
의친왕과 사토히로시의 부채 기록
동년 의친왕은 고문(顧問) 사토히로시(佐藤寬)와 함께 빚 6만 원이 있다고 하였다.88 고종은 궁내부를 통해 돈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의친왕이 고리대금업자에게 빌렸던 실제 빚은 2만여 원으로89 당시 황성신문 논설위원의 월급이 30~40원이었다.
이토 히로부미 조문 특사 임명 취소
1909년(순종 3) 9월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식 조문 특파대사(特派大使)로 임명되었다.90 그러나 10월 일본은 돌연 조문 특파대사를 민병석으로 변경하였다. 의친왕은 신용이 없고 인격이 실추되었으며, 이토 히로부미가 생전에 특히 싫어한 사람이라는 이유였다.91
경술국치 이전 활동
1910년 1월 탑골승방92, 4월 두모포와93 신흥사94에서 소창(消暢·답답한 마음을 품)하고 사냥을 다녀온 후95 생재종형 이지용과 함께 기생들을 데리고 풍류를 즐겼다.96 5월 상사동에 거주하는 측실의 집에서 국악인 김창룡 등과 풍류를 즐긴 후97 부산항을 유람하였다. 동월98과 6월에는 신흥사와99 이지용의 정자에서 소창하였다.100 7월 측실 농주(弄珠)와 신흥사에서 소창하고101 통감부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주최한 만찬회에 참석하였다.102 8월 측실 김금주(金錦珠)와 신흥사에서 소창하였다.103 경술국치 직전 신한민보는 의친왕에 대해 보도하였다.104
부끄러운 줄 모르는 의친왕은 나라가 망해도 친왕으로 대우한다는 바람에 아무 걱정 없이 기생을 데리고 놀러 다닌다.
일제강점기
1910년대
공족, 이강 공
…(중략)… 조령을 내리기를,
"짐(메이지)이 생각건대,이강(李堈) 및 이희(李熹)는이왕(李王)의 의친(懿親)으로 명성이 일찍부터 두드러졌고 근역(槿域)이 우러러 보고 있으니 마땅히 특별한 대우를 가석(加錫)하여 그 의칭(儀稱)을 풍부하게 해야 할 것이다. 이에 특히 공(公)을 삼고 그 배필을 공비(公妃)로 삼고 모두 황족의 예로써 대하고 전하(殿下)라는 경칭을 쓰게 하여 자손으로 하여금 이 영광의 하사를 세습하여 영구히 아끼는 영광을 누리게 한다."105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메이지 일왕의 조령에 의해 구 대한제국 황실은 이왕가로 격하되었고 고종은 덕수궁 이태왕·순종은 창덕궁 이왕·순종의 윤 황후는 창덕궁 이왕비가 되었다. 의친왕은 공족으로 공(公)의 작위를 받아 이강 공이 되었고, 궁가 사동궁은 이강 공저(李堈 公邸)가 되었다. 또한 은사공채(은사금) 83만 원을 받게 되었다.106107 구 대한제국 황실의 직계·방계·인척 중 이희 공(흥친왕)은 83만 원, 윤택영은 50만 4천 원, 박영효는 28만 원, 이준 공(영선군)은 16만 3,000원, 이지용은 10만 원을 받았다. 또한 이재완·이재극·민영린 등도 받았다고 하였다.108 조선귀족 작위 거부자 및 세습 거부자는 조정구·조경호·윤용구·홍순형·윤홍섭·조한국이다.
1910년대 활동
1911년 1월 이강 공은 일본 제국 육군 중장에 임명되었다.109 동월 《일본의 조선(日本之朝鮮)》에 「양국은 칠에 아교를 넣은 듯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친필을 게재하였다.110
1912년 메이지(明治) 일왕이 사망하자 적형 이왕(순종)의 명을 받고 장례식에 참석하였다.111 1913년 4월 일제로부터 훈1등 한국병합 기념장(勳一等 韓國倂合 紀念章)을 수여받았다. 이후 경주로 견학을 다녀오고112 부여를 다녀온 뒤113 5월 벚꽃 관광을 하였다.114 7월 이왕가를 대신하여 메이지 일왕의 1주기에 참석하였다.115 8월 이완용과 함께 다이쇼(大正)의 식사 초대를 받고116 도쿄를 다녀왔다.117 9월 낙산 가을 풍경을 감상한 뒤 안순환(안교환)의 정자에서 연회를 베풀고 박영효·윤택영·송병준 등과 함께 이왕직 차관 고미야 미호마츠(小宮三保松)를 초대하여 시간을 보냈다.118 1914년 10월 원산으로 유람을 다녀왔다.119 1915년 8월 여주를 다녀오고120 9월 해인사 축제와121 가정박람회에 참석하였다.122 10월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관람하였다.
1916년 1월 김천을 다녀온 뒤124 덕유산에서 수렵을 하였다.125 7월 이강 공은 조선호텔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사부로(山県 伊三郎)·이왕직 차관 고미야 미호마쓰(小宮 三保松)·서기관장 고마쓰 미도리(小松綠)·이왕직 사무관 윤덕영·김춘희 등을 초대하여 오찬을 열게 되었다.126 11월 히로히토(裕仁·훗날 쇼와 일왕)의 저위(儲位) 책봉식에 참석한 뒤 다이쇼 일왕을 만났다.127 이후 다이쇼 일왕이 궁중 내 천종간(千種間)으로 이강 공·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閑院宮 載仁 親王)·히가시후시미노미야 요리히토 친왕(東伏見宮 依仁 親王) 등을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하였다.128 1917년 4월 창덕궁 이왕(순종)이 함흥을 방문할 때 수행하였다.129 7월 이강 공은 조선호텔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사부로·군사령관 아키야마 요시후루(秋山 好古) 등을 초대하여 만찬회를 개최하였다.130 12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사부로·박영효 등을 조선호텔로 초대하여 만찬회를 개최하였다.131 1918년 1월 조선호텔로 서제(庶弟) 이왕세자(영친왕)를 초대하여 만찬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조선총독부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사부로·이왕직 장관 · 등도 참석하였다. 1919년 1월 부친 이 사망하였다.
독립신문의 독립성명문
1919년 11월 20일 독립신문에 이강 공의 독립성명문이 보도되었다.133
一. 일본은 몇몇 매국노 간신과 결탁하여 나의 부황과 모후를 시해하였다. 부모를 잃은 원한을 열국에 호소하기 위함이다.
二. 3월 1일 이래 우리 인민은 모두가 하나 되어 맨손으로 일어나 독립만세를 외쳤다. 적들은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적수공권의 인민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하는 등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무장한 우리 인민의 독립을 향한 뜨거운 피는 식지 않았다. 강건한 민족정신을 가진 우리는 결코 일본에 동화되지 않을 것임을 만천하에 선포하기 위함이다.
三. 10년 전 맺어진 합병조약은 무력과 위협을 앞세워 체결된 것이다. 부황께서는 결코 합병조약을 승인한 사실이 없다. 한일합병의 진실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이다.
四. 나 역시 한국민의 한 사람이다. 독립된 한국의 일개 서민으로 살망정, 합병된 나라의 황족으로 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우리 임시정부가 소재하고 있는 곳에 가 정부의 여러 책임자들과 손잡고 생사를 같이하며 협력하여, 동포들이 겪는 고통의 만분의 일이라도 덜어주고 싶다. 나의 결심은 집안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며, 동시에 조국독립과 세계평화를 위한 것이다.134
조선민족대동단과 상해 망명 시도
1919년 3월 일진회 회원 전협과 최익환이 중심이 되어 서울 봉익동 62번지 전협의 집에서 대동단(조선민족대동단)을 결성되었다. 항일독립운동을 위해 귀족·관계(官界)·유림·상공인·학생을 대상으로 단원을 모집하였고 김찬규(金燦奎)·민영달(閔泳達)·김가진·박영효 등이 가담하였다.135 대동단은 이강 공이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망명한다면 독립운동의 파급력이 클 것으로 예상하고 이강 공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동단의 계획을 받아들이고 특파원 강석룡(姜錫龍)으로 하여금 대동단과 연락하여 이강 공의 망명 계획을 추진토록 하였다. 이러한 계획을 추진할 때 이강과 접촉하는 것은 이강 공비(의친왕비)의 동생 김춘기(金春基)가 맡았고 마침내 이강도 동의하기에 이르렀다.136 10월 대동단 총재 김가진이 상해망명을 단행하였다.137 11월 이강 공 일행은 일본의 감시를 뚫고 상해 망명을 시도하였다. 9일 이강 공은 "수인당 김흥인(의친왕의 측실)과 간호사 최효신(崔孝信)에게 중대한 비밀서류와 고종이 외국인에게 150만 원을 맡긴 증서가 있으므로 동반해야 된다."라고 하였다. 이강 공은 1911년 혹은 1912년 부친 고종이 "이용익(李容翊)에게 기탁하여 각 은행에 예금한 돈이 상해 덕화은행(德華銀行)에 있을 것이니 찾아서 돈을 받으라."라고 하며 자신에게 증서를 건넸다고 하였다.138 다만 이는 사전 계획에 없었기 때문에 김흥인과 최효신의 여행증명서는 준비되지 않았다. 10일 오전 수색역에서 평양행 기차를 탔고 이어서 평양에서 안동현으로 향했다. 11일 안동현역에서 상해로 가려다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서울로 강제 송환되었다.139
조선민족대동단의 독립선언서
반만년 역사의 권위와 2천만 민중의 성충(誠衷)을 의지하여 우리 국가의 독립국됨과 우리 민족의 자유민됨을 천하 만국에 선언하며 또 증언하노라.
근역청구(槿域靑邱·우리나라)는 타인의 식민지가 아니며, 단군의 자손 고려의 민족은 남의 노예가 될 인종이 아닌 것이다. 나라인즉 동방 군자(君子)의 나라요, 민족인즉 선진한 선인(善人)의 민족인 것이다.
험란하여 나아갈 수 없는 운수를 당하여 정치가 오래 되고 삶이 어지러워질 때에, 밖에는 고래같이 삼키는 강한 이웃이 있고, 안에는 나라를 병들게 하는 간사한 도적이 있어, 5천 년의 신성한 역사와 2천만 예의의 민족과 5백 년 내려온 종사의 황족이 하루 아침에 인멸되니 조정에는 순국하는 신하가 있고, 초야에는 절개를 지켜 죽는 백성이 있으나, 황천(皇天)이 돌보지 아니하고 국민이 녹(祿)을 받을 복이 없어 황제가 성명(聲明)에 갑자기 폐천(廢遷)당하는 욕을 만나고, 사민(士民)이 거의(擧義)에 문득 발이 섬멸되는 화를 당하니 세상에 범람하는 가혹한 법과 잔학한 대우와 노예로운 사역에 백성이 편안히 살 수가 없게 되었도다.
불평이 울면 법률이 강도와 같이 이를 찍으니 무릇 지아비의 충의의 혼이 잔인한 칼날 아래 소멸된 자가 그 몇 천 몇 만인가. 한을 머금고 고통을 씹으며 섶에 누워 쓴 쓸개를 맛봄이 10개 성상을 겪었더니라.
음(陰)이 극(極)하면 양(陽)이 돌아오고 음양이 조화되어 사물이 이치에 통하는 것이 소멸될 수 없는 것은 하늘의 이치의 좋은 운수이며, 죽음에 처하여 사랑을 바라고, 오래 굽히고 있으면 일어날 것을 생각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에 있어서 지극한 감정인 것이니, 세계 개조와 민족 자결의 의논이 천하에 높이 오르고 우리 나라의 독립과 우리 민족의 자유의 소리가 우내(宇內)에 가득 넘치는지라, 드디어 3월 1일에 독립을 선언하고 4월 10일에 정부를 건설하였도다.
저 미련하여 도덕을 모르는 일본이 시세(時勢)의 추이를 돌보지 아니하고, 다만 표범이나 이리의 야만성을 구사하여 압박과 억제를 크게 마음대로 행하니 백수(白手)의 도중(徒衆)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성읍과 촌락을 불질러 태우니 이것이 인류의 양심으로 감당해 참을 바일까. 우리 민족의 단충(丹衷)과 열혈은 결코 이 비정리적(非正理的)인 압박에 감축될 바가 아니요, 더욱더욱 정의와 인도로써 용감히 나아가고 매진(邁進)할 뿐이로다. 만일 일본이 끝내 과오를 뉘우침이 없다면 우리 민족은 부득이 3월 1일의 공약에 의하여 최후의 1인까지 최대의 성의와 최대의 노력으로 혈전(血戰)을 불사코자 이에 선언하노라.
대한민국 원년 11월 조선 민족 대표
여기에 연서(連署)한 사람은 의친왕 이하 두 사람(김가진·전협) 외에 양정(楊楨)·이정(李政)·김상열(金商說)·정상무(鄭相武)·백초월(白初月)·최전구(崔銓九)·조형구(趙炯九)·김익하(金益夏)·정설교(鄭卨敎)·이종춘(李種春)·김세응(金世應)·정의남(鄭義南)·나창헌(羅昌憲)·한기동(韓基東)·신도안(申道安)·이신애(李信愛)·한일호(韓逸浩)·박정선(朴貞善)·노홍제(魯弘濟)·이직현(李直鉉)·이내수(李來修)·김병기(金炳起)·이겸용(李謙容)·이설후(李雪吼)·신태련(申泰鍊)·신형철(申瑩徹)·오세덕(吳世德)·정규식(鄭奎植)·김홍진(金宖鎭)·염광록(廉光祿)140
11월 28일 조선민족대동단은 이강과 33인의 민족대표 명의로 제2 독립선언서(조선민족대동단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망명 시도·대동단 독립선언서 서명 부정 기록
1919년 11월 24일 일제는 이강 공의 상해 망명 기도와 관련하여 신문조서를 기록하였다.
이강 공은 평소 마음이 평온하지 못하였고, 또 누차 외유(外遊·외국에 나가려 함) 뜻을 측근에게 누설한 일이 있었다. 이에 불령(不逞)의 무리들은 공을 옹립하여 국권회복운동에 종사하게 하면 양반 유생은 물론 조선 내외 인민의 신용을 크게 얻을 수 있음을 보고, 은밀히 공을 유인하여 데려낼 계획이 있었다. 공은 평소 주색을 가까이하고 행동이 자주 상궤를 벗어났으며, 또 즐겨 시정의 잡배들과 왕래하였다. 특히 금년 봄 독립 소요의 수괴인 손병희와는 은밀히 회합하여 모의하였고, 손이 체포되자 공은 자못 낭패한 기색이 있었다고 한다.
최근 불령의 무리가 공을 유인하여 상해로 달아나려 한다는 풍설이 있으므로, 경기도 제3부는 엄중히 공저 부근을 경계하였다. 그런데 공은 11월 9일 오후 10시경 종자 김삼복을 데리고 은밀히 그 저택을 빠져나가 소재가 분명하지 않게 되었다. 이에 경보를 사방에 발하고 극력 수사한 끝에 마침내 11일 오전 11시 30분경 중국 안동 정차장 구내 밖에서 공 및 동행자 정남용을 발견하여 경성으로 보호 연행하였다. 동시에 이재호 외 수명이 경성 초음정에 잠복해 있음을 알고, 12일 미명 초음정 192번지 이관수의 집에서 이재호를 체포하였다. 또 불령자들이 경성 창의문 밖 산복의 민가에 있음을 탐지하여 같은 날 오후 4시 반 동창률, 정운복, 김삼복 3인을 체포하였다. 아울러 동창률의 소지 권총 및 가택을 수색하여 불온문서와 그 원고 및 인쇄기 1대를 발견 압수하였다. 이어 19일에 이르기까지 거괴 전협 이하 공범자 수명을 체포하였다. …(중략)…141
1919년 12월 조선민족대동단 신문조서에서 이강 공은 망명 시도와 조선민족대동단 선언서(제2 독립선언서)에 대해 부정하였다.
「신문조서 1」
…(중략)…
이강 공:
북문(北門) 밖의 민가에 도착한 것은 오전 3시경의 일이었는데, 나는 정운복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날이 밝았고, 그 사이 전협(全協)등은 무엇인가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오늘 이곳을 출발하여 안동현(安東縣)으로 가 그곳에서 9일 가량 기다렸다가 배를 타고 가는 것이 좋겠다든가, 상해(上海)로 사람을 보내 내가 상해(上海)에 도착했다는 취지의 전보를 이곳을 향해 띄워 당국의 주의를 다른 방면으로 집중시켜 두고 그 후에 가기로 하는 것이 좋겠다든가, 김가진(金嘉鎭)을 보낼 때에도 배에 태워 보냈다든가, 김가진(金嘉鎭)에게는 이(李) 시종이 권하여 3천 원을 주었다든가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협(全協) 등은 정운복과 나를 동행시키지 않도록 하면이라고 하는 것 같았으므로 그들이 없을 때에 나는 정운복에게 「꼭 나와 동행해 달라, 그렇지 않으면 사정이 좋지 않다.」고 말했던 것이다.<br/
경장삼랑(境長三郞):
그 민가를 나와 수색(水色) 정거장에서 승차하여 안동현(安東縣)으로 가는 것은 어떠한 이야기가 있어 정한 것인가.
이강 공:
아무리 내가 귀가하려고 하여도 들어먹히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어디까지엔가 가서 기회를 보아 돌아가기로 할 작정이었다. 그리하여 정운복(鄭雲復)은 동행시키지 않는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아무튼 우선 그곳을 나와 안동현(安東縣) 쪽으로 가기로 하였던 것이다. …(중략)…
경장삼랑:
제2회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니 증인에게 이름을 내도록 하라는 교섭이 있었던 일은 없는가.
이강 공:
없었으나, 내 승낙없이 내 이름을 늘어놓은 선언서를 낼 계획을 하는 자가 있다는 것으로, 내가 이곳을 출발하기 전 발표할 계획으로 되어 있던 것을 출발 전에 발표하면 떠들어댈 우려가 있다 하여 내가 출발하기까지 강석룡(姜錫龍·본명 강태동)이 제지했다는 것을 김춘기(金春基)로부터 들어 안 일이 있다. 그때 나는 자신이 이름을 내는 것을 승낙하지 않은 것이니 그러한 것은 아무리 발표해도 상관없으므로 「내려면 내라고 하라」고 말하였다. 내 생각으로는, 그렇게 내 이름을 낸다고 하면 내가 곤란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나를 위협할 작정은 아니었는가 생각된다.
경장삼랑:
그때 그 선언서의 문의(文意) 및 기안자에 대한 것은 듣지 못했는가.
이강 공:
듣지 못하였다.
(이때 대정大正 8년 형刑 제4429호의 증거품 령領 제1404호의 3을 보이다)
경장삼랑:
증인은 이 선언서를 본 일이 없는가.
이강 공:
지금 처음 본 것으로, 전에는 본 일이 없다. …(중략)…142
「신문조서 2」
…(중략)… 그것은 기억에 없는 일이다. 김춘기(金春基)로부터 들은 일이 있는 강석룡(姜錫龍)의 이야기에 제2회 독립선언서인가에 나의 명의를 실었다고 하는 것이기에 나는 「그것은 괘씸하다. 내가 적어도 서명한다고 하면 당당하게 할 것인데 승낙하지 않은 것을 이름을 도용하는 것은 못된 짓이라」고 책했더니 그 후 배부를 중지했다는 것이었으나, 나는 본 일이 없다.143
조사관 천엽료(千葉了)가 대동단에 대해 진술하라고 하자 이강 공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 것으로 기록되었다.144
…(중략)… 참으로 일신 상의 일을 말해 불평 같기는 하나, 내가 술을 마시거나 빚을 지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핀잔을 받는 것 같은 행동을 하는 것도 모두 나쁘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괴로운 심정을 어떻게 할 수 없어 대개는 술 때문에 전후를 기억하지 못하며, 차용금에 관해서는 경제 관념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많이 이익을 빼앗기고 나의 얻는 바가 없는 것도 알고 있지만 난폭하게도 뒤에 정리를 해 달래고 있다. 물론 경제 상에 관해서는 예산 상 허용되지 않는 것도 안다. 그래도 너무 그 방법이 냉정하여 나로서는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쪼록 적당한 보호의 방도를 세워 유쾌하게 지낼 수 있도록 바란다. 나는 어려서 어머니(귀인 장씨)와 헤어져 모후(명성황후)에게 괴로움을 받았고 다음에는 똑같이 서모(순헌황귀비)에게 억압 당했으며, 이어서 지금은 또한 이왕직(李王職) 중의 간사한 놈 때문에 사람이 모르는 고통을 맛보고 있다. 나를 어리석다고 하겠으나 선악의 차별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나의 불평의 연유 하는 바를 통찰 하여 잘 중재(仲裁)해 주기 바란다. 또 본 건의 처벌에 있어서도 아무쪼록 관대한 처분을 절망(切望)한다.
조선민족대동단 사건은 재판에 회부되었다. 전협(全協)은 징역 8년145, 최익환은 6년을 언도받았다. 정남용, 이재호, 권태석 등 권련자 20여 명도 최고 5년에서 최하 2년까지 언도받았다.146 김가진은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 고문을 역임하였다.147 이강 공은 조선총독부 부속 녹천정(綠泉亭)으로 옮겨져 외부인과의 만남을 차단당하였고, 1919년 12월 30일 이강 공저로 돌아가게 되었다.148
1920년대
사이토 마코토에게 보낸 서한
1920년 이강 공이 조선총독부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에게 서한을 보낸 기록이 나타나 있다.
수상 각하
본인은 귀하께서 본인이 중국에 갈 당시 귀하의 경찰에 의해 어떻게 제지되었는지를 알려 드렸던 본인의 앞서의 서한들을 잘 받아보셨는지 모르겠읍니다. 수일 전에 경관들이 본인에게 와서 즉각적으로 동경으로 갈 것을 명령했읍니다. 그들은 또한 본인이 자의에 의해 동경에 간다는 것을 공표하도록 엄명했읍니다. 본인은 이 모든 행동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읍니다.
본인은 한국의 한 왕이며, 그보다 일본의 황족이라는 것을 귀하에게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귀하의 경찰에 의해서 불량자처럼 취급받았읍니다. 본인은 아직도 귀하의 경관들이 본인에게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동경에 가도록 강요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읍니다. 본인은 각하께서 이 경관들의 행동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본인에게 해 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수상 각하, 본인은 본인의 왕자의 지위를 거부하며 본인의 유일한 희망은 일개의 시민으로서 간주되길 원하면서 여생을 그렇게 보내고 싶다는 것을 이 기회에 폐하(다이쇼)께 알려 드리기 위해 이 기회를 이용하고자 합니다.149
천도교 잡지 「개벽」의 세태비평
…(중략)… 이왕가 왕족들은 어떠한지 좀 말하고 그만 두자. 이 씨 중에 이강 공(李堈 公)은 다 아는 일이니까 강론할 필요도 없거니와 이지용·이재각·이해승·이재극 등 여러 사람들이 다 남 부럽지 않게 한참 첩 놀이를 잘하였다. …(중략)…150
1924년 7월 천도교 잡지 개벽(開闢)에 첩실에 대해 세태비평 기사형태로 보도되었다.
한성은행 대주주
이강 공은 1921년·1923년·1925년·1927년 한성은행(漢城銀行)의 대주주로 기록되었다. 대주주는 이왕직 장관 및 일본인을 제외하고 이준 공(영선군)·고희경·민영휘·박정양·이달용·이완용·이윤용·이항구·한창수 등 대부분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151
동의기념비(同義紀念碑)
동의기념비(同義紀念碑)는 1906년(고종 43)부터 1909년(순종 3)까지, 1910년부터 1914년까지의 의병 명단을 기록한 비석으로 1929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산외면 오공리에 세웠다. 비석 전면에는 하청사(河淸祠)를 건립하고 비석을 세우는데 동의한 최익현(崔益鉉)을 비롯하여 유림 264명의 이름을 새기고 뒷면에는 비석을 건립한 뜻을 새겼다. 비문(碑文)은 이강이 썼다. 하청사(河淸祠)는 1928년 이희봉·권영모 등 유림 34인이 발의하여 일본에 항거한 애국지사 최익현·임병찬·오계업·박재규·박재구 등 5인을 향사하기 위하여 하청사를 건립하였다. 하청사는 1950년 6·25 전쟁 때 소실되었고 현재 동의기념비만 남아 있다.152
1920년대 활동
1921년 4월 이강 공은 조선군사령부 육군 중장으로 임명되었다.153154 1922년 1월 조선호텔로 조선총독부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 實)·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미즈노 렌타로(水野 錬太郎) 등을 초대하여 만찬을 개최하였다.155 7월 조선호텔로 아리요시 주이치(有吉 忠一)·부국장 등을 초대하여 만찬을 개최하였다.156 11월 일본제국 육군대연습에 참여하고157 다이쇼 일왕 부부를 만나게 되었다.158 또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아리요시 주이치(有吉 忠一)를 고이시카와 고라쿠엔(小石川後楽園)으로 초대하여 만찬회를 개최하였다.159 11월 28일 일제의 궁중 죽간(竹間)에서 데이메이 왕후·이왕세자(영친왕) 등을 만났다.160 29일 후시미노미야 사다나루 친왕(伏見宮貞愛親王)이 이강 공·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秩父宮雍仁親王)·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閑院宮載仁親王)·(久邇宮邦彦王)·(梨本宮守正王)·이왕세자(李王世子) 등을 초대하여 만찬회를 개최하였다. 12월 도쿄에서 공부하고 있는 서장자 과 이준 공()의 양자로 출계한 를 만나고 귀국하였다. 1923년 2월 (有吉 忠一)를 조선호텔로 초대하여 만찬을 개최하였다. 1924년 1월 8일 일제로부터 훈1등 (勳一等 大勳位 菊花大授章)을 수여받았다. 1월 의 결혼식을 참석하기 위해 도쿄로 향하였다. 2월 히로히토의 결혼식이 끝나고 궁내부대신 마키노 노부아키(牧野伸顯)가 초대한 만찬회에 참석한 뒤 귀국하였다. 2월 다이쇼 일왕과 메이데이 왕후가 요양 중인 누마즈 별장 근처에 큰 화재가 나자 이왕()·이강 공·조선총독부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안위를 걱정하며 전보를 보내게 되었다. 8월 이강 공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下岡 忠治)를 조선호텔로 초대하여 만찬회를 갖게 되었다.
1925년 4월 이강 공·이왕직 장관 민영기·조선귀족 대표 이항구 등은 다이쇼 일왕과 메이데이 왕후의 은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로 향하였다.170 5월 도쿠가와 이에사토(德川家達) 종질료(宗秩寮·궁내성 산하기관) 총재가 자택으로 이왕세자(영친왕)·이왕세자비(이방자)·이강 공·덕혜옹주를 초대하여 원유회를 개최하였다.171 6월 이강 공은 동소문(혜화문) 밖에서 군사령관·사단장·사령관·대장 등과 원유회(遠乘會)를 가지게 되었다.172 1926년 3월 이왕세자(영친왕)가 이왕(순종)의 병문안을 하기 위해 귀국하였고, 이강 공은 조선호텔로 이왕세자·스즈키 소로쿠(鈴木莊六)·이왕직 사무관 등을 초대하여 연회를 개최하였다.173 4월 적형 순종이 사망하였고 5월 순종과 순명효황후의 유릉지를 시찰하였다.174 11월 사가현(佐賀縣) 내에서 열리는 대연습을 참관하게 되었다.175 1927년 6월 이강 공은 지병 류머티즘의 통증으로 전의(典醫) 안상호를 부르게 되었다.176 1929년 4월 불국사를 시찰하였고177
1930년대
공(公) 작위 은거(隱居)
1927년 이강 공과 요코하마(横浜)에 거주하는 러시아인의 염문설이 발생하였다. 러시아인은 과거 이강 공에게 약속 받았던 위자료 1만 엔을 요구했지만, 이강 공저에서 거절하자 가나가와현(神奈川県) 지사에게 진정서를 제출하게 되었다. 이에 궁내성이 내사를 한 결과 제국호텔 매점 직원 고바야시 아야코(小林アヤ子) 외에 여러 명과 염문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하였다. 결국 궁내성은 이강 공의 은거를 검토하게 되었다.
1929년 정무총감 고다마 히데오(兒玉 秀雄)는 이강 공에게 이건이 지난해 성년에 이르렀으나 규정상 전하의 존칭을 받을 수 없으므로 이번 기회를 통하여 은거를 권유하였다. 이강은 승인하지 않았고 일본 여행을 떠난 뒤 7개월이 지나도록 조선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178 이후 일제는 이강이 이왕가로부터 30만 원을 받아 측실 수인당 김흥인·수덕당 이희춘·양용희·김금옥, 서자녀 이주(이인용 출계)·이곤(훗날 의친왕비 자녀 입적)·이영(이기용 출계)·이진(이기용 출계)의 처우·재정 정리비로 충당하라고 하였다. 이어서 이강이 벳푸(別府)에 영주(永住)할 뜻으로 이왕가로부터 3만 5천 원을 받아 가옥을 신축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이건은 공(公)위를 세습 하면 세비가 아닌 어장 수입·기타 수입으로 재원을 마련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179
1930년 이강 공은 지병을 이유로 쇼와(昭和) 일왕에게 은거(隱居)를 청원하였고, 왕황족회의 결의를 통하여 은거를 허가 받았다. 이강은 일제 군사령부를 면직하였고 공족으로서의 의무가 면제되었다.180 6월 12일 이강은 서장자 이건에게 공(公) 작위를 승계하였다. 이때 공족(公族)으로서의 지위와 전하의 경칭은 유지되었다.181182 또한 이강 공저(李堈 公邸)는 이건 공저(李鍵 公邸)가 되었고, 1931년 이강의 별장 성락원(현 서울 성북동 별서)의 소유자는 이건으로 변경되었다.183
1930년대 활동
이강은 1930년 6월 3일 일본 포드 공장을 방문하였고184 8월 귀국하였다.185 1931년 서장자 이건의 결혼식 참석으로 도쿄(東京)를 다녀왔고 벳푸(別府)에서 지내기도 하였다.186 1933년 5월 일본에서 서울 영등포역으로 귀국하여187 조선호텔에서 머물렀다.188 5월189과 9월 서울로 돌아왔고190 백천온천을 다녀왔다.191 1934년 서장녀 이영(李玲)의 결혼식 참석으로 귀국하였다. 5월 도쿄로 가서192 6월 서울로 돌아왔고193 이어서 부산을 다녀왔다.194 1935년195과 1936년196 일본을 다녀왔다.
1940년대
활동
1940년 4월 왕공가 방문 차 동경으로 가서197 그달에 귀국하였다.198 9월 서종고숙(庶從姑叔) 금릉위 박영효의 묘비문을 지었다.199
광복 이후
이강의 김구 예방
1945년 10월 이강은 이승만에게 찾아가 "광복을 위한 노력에 감사하고 앞으로 대한민국을 위해 계속 활동해달라."라고 전하였다. 이어서 "자신은 일평민(一平民)으로 대한민국을 위해 노력하겠다."라고 하였다.200 11월 23일 김구·김규식·이시영·김상덕·유동열·엄항섭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은 오후 4시 경 김포비행장에 도착하자 곧장 숙소(최창학의 집)로 향하였다. 이때 숙소에 미리 방문한 이승만과 잠시 이야기를 했을 뿐 모든 면회를 사절하였다.201 12월 이강은 경교장으로 가서 김구를 20여 분 만나게 되었다.202
애국협회 회장 추대
1946년 시급한 민생 문제를 해결하고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계몽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애국협회(愛國協會)가 결성되었다.203 이강은 회장에 추대되었다.204
사동궁 매각
1947년 왕공족 제도가 폐지되었다. 그해 박응래(朴鷹來)·김선태(金善泰)·최시화(崔時化) 등은 이강에게 사동궁(寺洞宮)이 적산(敵産) 취급을 당한다고 하였다. 이강은 당시 천수백만 원하는 사동궁을 백오십만 원에 매각하였다.205 곧이어 들어온 미군정이 사동궁은 국유 재산이라 매각이 부당하다고 했지만 대법원은 묵살하였다. 이강은 사동궁을 되찾기 위해 박응래·김선태·최시화 등을 고소하였다. 하지만 박응래와 최시화가 결탁하고 의친왕이 선임한 변호사를 내세워서, 이강에게 고소를 취소하라고 공갈 협박하였다. 1948년 이강은 고소를 취소하였다.206 이후 안동별궁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민족정기의 심판》
민족정기(民族正氣)의 심판(審判) 서문
서(序)
6천만의 눈동자가 주시(注視)하고 있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활약(活躍)이 점차 활발화하여 가고 있는 이때에 있어 친일파 민족반역자(親日派 民族叛逆者)들의 과거죄악사(過去罪惡史)를 더듬어 보는 것도 결코 무의미(無意味)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책자(小冊子)를 발간(發刊)하게 된 동기(動機)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소책자가 민족정기(民族正氣)를 양양(昻揚)하는 데 있어 또한 매국(賣國)의 무리들의 정기(正體)가 어느 정도 밝혀졌다면 이에 더한 기쁨이 없으며 앞으로 더욱 세밀(綿密)한 조사(調査)를 진행시켜 2집 3집 계속하여 출판(出刊)하려 한다.
단기(檀紀) 4282년 2월
편집자 일동(編輯者 一同)207
「왕족급공족(王族及公族)」
…(중략)…
이건 공가
이건 공: 이강 제1남 대훈위 일본 제국 육군 중좌
성자: 이건 공비 백작 광교진광 가족(송평반 제1녀)
…(중략)…
이강: 고 이태왕(고종) 제5남 대훈위
김 씨(의친왕비): 이강 비 고 남작208 김사준 제1녀
이우 공가
이우 공: 이강 제2남 대훈위 육군 소좌
찬주(박찬주: 이우 공비 후작 박영효 손(고 박일서 제1녀)
…(중략)…
이중에서도 고종황제의 매부되는 조정구(趙鼎九)씨는 퇴작할 뿐 아니라 한일합병의 조서와 유고문을 찢어 버리고 자살까지 계획하였으나 가족들에게 발견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중략)…209
1948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민족정기(民族正氣)의 심판(審判)》을 발간하였다. 이건 및 이우의 자녀들·순정효황후(사시)·영친왕(사시 의민황태자), 이방자(사시 의민황태자비)·이구(사시 회은황세손)·흥친왕비 이씨·영선군의 부인 정경부인 김씨도 기록되었다.
사망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 동래 포교당으로 피난을 떠났다. 서모 광화당 귀인 이완흥과 삼축당 김옥기와 피란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정부 지원금이 끊겨서 피죽으로 겨우 연명하였다. 1953년 휴전 협정 이후 안동별궁으로 돌아왔다. 동년 아들 이곤이 토건업자 등과 공모해 인장을 위조하고 명동 소재의 옛 조선 왕실 소유 토지와 주택을 700만 환에 매각했다가 사기 혐의로 체포되었다.210 징역 3년을 구형 받았으나, 7월 서울지방법원 제4호 법정에서 진행한 「구왕궁재산 부정처분사건」재판에서 6·25 전쟁 전까지 국가에서 지급한 보조금을 받지 못해 생활고를 겪고 있다는 점이 고려되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5년을 언도받았다. 재판장은 "왕족이라고 해서 특별한 은전을 베푼 것이 아니고 사회적인 동정이 그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곤은 서대문형무소 수감 2개월 만에 출소하였다.211
1955년 천주교로 개종하고 세례명 비오(Pius)를 받게 되었으며, 병석에서 부통령 장면(세례명 요한)을 대부로 하여 영세하였다.212 8월 16일 새벽 4시 17분213 의친왕 이강은 노환과 영양실조로 인하여 향년 78세를 일기로 안동별궁에서 사망하였다.
의친왕묘(義親王墓)
1955년 초장지는 양주 화양리(현 서울 광진구 화양동)이고 1965년 사친 귀인 장씨묘와 함께 서삼릉 경내로 이장되었다. 1996년 딸 이공(이해경)의 노력으로 의친왕묘와 의친왕비묘를 홍릉과 유릉 경내로 옮기고 합장하였다. 묘에는 상석, 향로석, 장명등, 망주석 등을 배치하였다.214
가족 관계
측실
의친왕비는 의친왕의 측실 수관당 정씨·수인당 김흥인·수덕당 이희춘에 대해 "내가 친히 기른 사람들이고 내 좋은 동무들이다."라고 하였다.
자녀
1965년 이전 의친왕비는 의친왕의 생존 자녀가 26명이라고 하였다.215 의친왕의 공식 자녀는 21명(12자 9녀)이다.
의친왕과 의친왕비 사이에 친생자녀는 없고, 이곤과 이공(이해경)이 의친왕비의 자녀로 입적(入籍)되었다.
의친왕이 등장한 작품
TV 시리즈
참고 자료
관련 서적
- 《나의 아버지 의친왕》(1997년 06월 01일), 이해경 저, 진.
- 《조선의 왕실과 외척》(2003년 04월 27일) 박영규 저, 김영사.
-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2004년 08월 20일), 이덕일 저, 김영사.
- 《제국의 후예들》(2006년 05월 25일) 정범준 저, 황소자리.
- 《대한제국 황실 비사》(2007년 08월 06일) 곤도 시로스케 지음, 이연숙 옮김, 이마고 펴냄.
- 《의친왕 전하》(2008년 08월 15일), 이효재 저, 의친왕숭모회.
- 《의친왕 이강》(2009년 07월 23일), 박종윤 저, 하이비전.
- 《황제 1,2,3 - 제국의 부활》(2009년 12월 15일) 문영 지음, 평민사 펴냄.
- 《의친왕과 황실의 독립운동:기록과 기억》(2022년 10월 14일) 경운박물관·의친왕기념사업회 지음.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