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李鍝, 1912년 11월 15일 ~ 1945년 8월 7일)는 영선군의 양자이자 운현궁의 제4대 종주이다. 생부는 의친왕이다. 일제의 강요로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일본 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최종 계급은 중좌에 이르렀다. 일제는 이우에게 일본인과 결혼을 요구했지만 불응·저항하고 금릉위 박영효의 손녀 박찬주와 결혼하였다. 일본 히로시마의 원자 폭탄 투하로 인해 사망하였다. 사시는 흥영군(興永君)이다. 2009년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민족문제연구소는 이우가 사실상 볼모의 처지였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명단에서 제외하였다.
생애
운현궁 계승
이우(李鍝)는 1912년 11월 15일 오전 6시 일제 강점기 조선 경기도 경성부 중부 관인방 사동궁(당시 이강 공저)에서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고종(당시 이태왕)의 서차남 의친왕 이강(당시 이강 공)의 서차남으로 태어났다. 적모는 의친왕비 김덕수이고 생모는 수인당 김흥인이다.1 1917년 3월 22일 흥선대원군(헌의대원왕)의 장손 이준 공(영선군)이 사망하였다. 이준 공의 자녀는 소실 전순혁에게서 태어난 서녀 이진완만 있고 아들이 없었다. 이에 3월 23일 덕수궁에서 열린 친족회의에서 이태왕(고종)의 뜻에 따라 이강 공(의친왕)의 서차남 이우를 양자로 결정하였다.23 5월 28일 이우는 생당숙 이준 공의 사후 양자로 입적되었다.4 5월 28일 상속을 승인하는 다이쇼 일왕의 특지가 일본 궁내성 고시 제8호로 발표되었고,5 8월 4일 재산 관리 및 보육 후견인으로 이준 공비 광산 김씨와 이왕직 장관이 선임되었다.6 이후 운현궁의 재산과 일제의 공 작위를 상속 및 계승하였다.7 이준은 1912년 아버지 이희 공(흥친왕)이 사망하자 뒤를 이어 공(公)의 지위를 세습하였다. 1917년 이준 공이 사망하자 이우는 운현궁의 상속자로 결정되어 공위를 세습 받아 '전하(殿下)'의 경칭을 받게 되었다. 당시 조선에서 공의 지위에 있었던 인물은 이우의 생부 이강 공과 이우 밖에 없었다.8
이우의 일제 공족 신분은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 공포된 이후 일본 제국 정부가 이왕가를 규율하기 위해 새롭게 창출한 신분이었다. 공은 오등작의 일종인 일본 화족과 조선귀족의 공작과는 다른 개념으로 서열상 일본 황족과 왕족 아래에 위치하지만 화족과 조선귀족보다는 높은 지위였다. 또한 일본 황족에 편입된 신분은 아니지만 강제 병합 당시 공포된 메이지 천황의 조서에 따라 황족에 준하는 예우를 받았다.9
일본 유학과 입대
1915년 경성유치원에 입학하여10 1918년 3월 28일 졸업하였다.11 1918년 1월 25일 일본 제국에서 일시 귀국한 생숙부 이왕세자(영친왕)이 경성유치원을 방문하였을 때 이우는 이왕세자 앞에서 창가 ‘매화와 꾀꼬리’를 불렀다.12 1919년 1월 21일 생조부 고종이 사망하자 150일 동안 복상(服喪)하였다.13 4월 경성종로공립심상고등소학교에 입학하였다. 1922년 종로소학교에서 심상과 3학년 과정을 마치고, 7월 5일 유학 명분으로 일본으로 보내져 학습원 초등과 4학년에 편입하였다.1415 7월 22일 여름 휴가를 이유로 조선으로 귀국하면서 오사카역을 통과하게 되었는데 오사카의 조선인들이 이우를 둘러싸고 일을 모의한다는 소문이 돌자, 오사카 소네자키(曾根崎) 경찰서에서 다수의 조선인을 검속하였다.16 이우는 일본 도쿄에서 체류하면서 거주 목적의 부동산을 구입하였으며 운현궁 도쿄 별저로 불렸다. 별저는 도쿄부 도요타마 군 시부야 정 오아자시타시부야(大字下澁谷) 아자도키와마쓰(字常磐松) 321번지(1932년 시군병합으로 도쿄시 시부야구 도키와마쓰 정 101번지로 개편)에 있었다.17 저택은 궁내성 기사 내장료(內匠寮)에 의해 설계되었고 1925년 완공되었다.18 내전과 외전으로 구분되었고, 포틀랜드 시멘트 반죽과 회반죽으로 마감한 브라운색이 도는 회색빛의 서양식 2층 건물이었다.
1926년 4월 26일 생백부 순종이 사망하자 장례식을 집행하는 종척집사(宗戚執事)로 임명되었고,19 5월 10일 순종의 능을 천릉할 때도 종척집사로 임명되었다.20 한일 강제 병합 이후 이왕가를 규율하기 위하여 1926년 12월 1일 일본 황실령 제17호로 제정·공포되었던 《왕공가궤범(王公家軌範)》 제59조에 따르면 왕·왕세자·왕세손·공은 만 18세가 지나면 육군 또는 해군 무관으로 임관하여야 하는 의무가 강제되었다.21 따라서 이우는 학습원 중등과 졸업 후 1926년 4월 육군유년학교 30기생으로 입교하여2223 1929년 3월 18일 졸업하였다.24 1929년 4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45기생으로 예과에 입교하였다.25 1931년 3월 18일에 육군사관학교 예과를 졸업하고,2627 사관후보생으로 임명을 받아 도쿄 야포병 제1연대에 배치되어 근무하다가28 10월 본과에 입교하였다.29 1932년 11월 성년이 되어 이왕직 장관이 맡았던 후견인 업무가 종료되었다.3031 도쿄와 운현궁 노안당에서 관례식을 올렸고, 조선호텔에서 피로연을 열었다.32 1933년 7월 11일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고,33 10월 25일 포병 소위로 임관하면서 근위 포병 제1연대에 배속되었다. 야전포병학교를 수료하고, 1934년 12월 육군포공학교 보통과에 입학하였고, 1935년 10월에 포병 중위로 진급하였다. 1936년 8월 1일 도쿄 야전중포병 제8연대로 배속되었고, 11월 육군포공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본래 부대로 복귀하였다. 1938년 3월 1일 포병 대위로 진급하여 야전포병학교 교관이 되었으며, 교도연대 중대장을 겸임하였다.
1938년경 여성운동가이자 교육자 황신덕이 교육사업을 위해 이우에게 소유하고 있는 경성부 서대문구 죽첨정 일대(현 강북삼성병원 영안실 부지)의 부동산을 하사해줄 수 있는지 문의하자 승낙하였다.41 1940년 10월 10일 황신덕은 하사받은 부동산에 경성가정여숙(현 중앙여자고등학교)을 설립하였고, 이와 같은 인연으로 광복 이후 1950년 4월 28일 이우의 부인 박찬주가 재단법인 추계학원의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4243
1938년 12월 27일 일본 육군대학교 제54기생으로 입교하여44 1941년 7월 31일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조선인은 이우를 포함하여 영친왕 이은·이건·홍사익뿐이었다.45 1940년 3개월 동안 중국 전선을 시찰하고 9월 26일 일본 후쿠오카로 귀환하였다.46 11월 육군대학생의 자격으로 중부 제37부대에 소속되어 교토 사단 추계 연습에 참가하였다.47 1941년 조선군사령부에 배속되었고,45 10월 15일 소좌로 진급하였다.48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1942년 3월 육군대학교 연구부 부원으로 전보되었고49 5월에는 각 전선을 시찰하였다.50 1944년 3월 중국 산시성 타이위안으로 전출되어 북지나 방면군 제1사령부 참모 장교로 근무하였다.41 타이위안에서 근무하던 시기에 타이항산 유격대를 지원하였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나 현재 사료 및 정황 증거는 남아 있지 않다.51 타이항산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군은 이우가 중국으로 전출되어 오기 전에 이미 중국 공산당에 의해서 1943년 12월부터 1944년 3월까지 으로 이동을 완료한 후였다.
결혼
일본인과 결혼을 강요하던 일본 궁내성과 이왕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생부 이강(의친왕)과 재종조고부 박영효의 지원을 받아 박영효의 서차남 박일서(朴日緖)의 딸 박찬주와 1935년 결혼하였다.
일본 궁내성과 조선총독부는 이왕가의 자녀를 일본 황족 또는 화족의 자녀와 결혼시켜 혼인 관계를 형성하려고 하였다.53 이와 같은 목적으로 《왕공가궤범》 제119조에 따르면 왕공족의 혼인은 일왕의 칙허를 통해서만 인정되었다. 생숙부 이왕세자(영친왕)·생고모 덕혜옹주·본생가 서형 이건의 혼인과 같이 일본인과의 정략 결혼이 추진되어 궁내성에서는 백작 야나기사와 야스쓰구의 딸을 이우의 배우자로 내정해 놓고 있었다. 야나기사와는 이우의 본생가 서형 이건의 장인 해군 대좌 마쓰다이라 유타카와 동서가 되었으며, 생숙부 이왕세자의 장인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와도 동서 사이였다. 모두 옛 사가 번의 다이묘였던 후작 나베시마 나오히로의 사위들로 궁내성의 계획대로 된다면 왕공족 남자 전부는 나베시마의 외손주 사위가 되는 셈이었다.54
이강은 아들이 일본인과 결혼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이우도 조선인과의 결혼을 고집하였다.41 일본인 신부를 거부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던 중에 의친왕과 긴밀한 관계였던 박영효의 서손녀 박찬주가 이우의 배우자로 물망에 오르고 혼약이 이루어졌다.55 이우의 양모 광산 김씨는 박영효가 내무대신으로 재임하던 1895년 당시 법무협판 김학우 암살과 모반 혐의로 양부 이준을 죽이려 하였기 때문에 박찬주를 못마땅하게 여겼다.41 이우는 박찬주에게 사주단자와 약혼반지를 보낸 후에 당시 이왕직 장관 한창수에게는 혼약이 성립되었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하였다.56 왕공족의 사무를 관장하던 이왕직은 박찬주와의 혼약이 일왕의 칙허없이 진행되었다고 반발하며, 일본 황족과 결혼하라는 압력을 행사하였다.57
하지만 이우의 조선인과 결혼하겠다는 저항과 박영효의 일본 정계를 상대로 벌인 로비의 결과로 일본 궁내성과 이왕직은 이우와 박찬주의 혼약을 인정하게 된다. 박영효는 일단 혼약이 철회된 것처럼 해놓고, 직접 도쿄에 가서 귀족원 칙선 의원이자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이라는 직책과 인맥을 활용하여 추밀원·귀족원·궁내성에 공작을 벌였다.58 결국, 1934년 7월 11일에 궁내성 종질료(宗秩寮)에서 약혼을 인정하는 담화를 발표하였고,59 1935년 4월 17일 혼인을 인정하는 쇼와 천황의 칙허가 발표되었다.60 1935년 5월 3일 이우와 박찬주는 도쿄 별저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며,61 6월 28일 경성으로 돌아와 종묘와 능원을 참배하고 조선호텔과 운현궁에서 피로연을 열었다.62 1936년 4월 23일 도쿄 별저에서 장남 이청(李淸)이 태어났고,6364 1940년 11월 9일 차남 이종(李淙)이 태어났다.6566
죽음
피폭과 사망
1945년 6월 10일 중좌로 진급되었고67 본토결전을 위하여 일본으로 전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68 이우는 일본으로 가지 않고 운현궁에 머물며 전역을 신청하기도 하고 조선에 배속시켜 달라고 청원을 넣기도 하였지만 모두 거절당하였다.41 운현궁에 머무는 한 달 동안 윤원선·김을한 등을 만나 “일본의 패전은 기정사실이며 한국이 독립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런데 미국뿐만 아니라 소련도 가만있지 않을 테니 해방 후의 뒷수습이 큰 문제다.”라고 걱정하면서 이제 군복을 벗고 운현궁에 있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고 한다.69 또한 이우의 본생가 둘째 여동생 이진(이인용 출계)은 이우가 히로시마로 전출될 당시 일본으로 가면 죽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부인과 자식을 죽이고 가겠다며 권총을 들고 소란을 피웠으며 가족들이 이를 만류하였다고 증언하였다.70
1945년 7월 16일 일본 도쿄에서 이왕 부부(영친왕·이방자)를 만나고, 며칠 후 부임지인 히로시마로 이동하였다.69 이우는 히로시마의 서쪽에 위치한 고이(己斐)의 가어전(假御殿)에서 머물며 히로시마 일본군 제2총군 참모본부로 출근하였다.71 8월 6일 이우는 자동차 대신 말을 타고 출근하겠다고 하고 참모본부로 말을 타고 출근하는 도중,53 시 중앙부에 있는 후쿠야(福屋) 백화점 부근(폭심지에서 710m)에서 원자 폭탄에 피폭되었다. 이우는 그날 오후 혼가와(本川) 아이오이 교 아래에서 발견되었다.71 발견 당시 얼굴에서 가슴까지 화상을 입어 피부가 문드러져 있었으며 윗옷도 날아간 상태였다.72 그날 밤 히로시마 남단의 니노시마 섬에 있는 해군 병원으로 후송되어 의식을 되찾았지만 자정이 넘으면서 급속도로 상태가 악화되었고,53 8월 7일 새벽에 고열로 신음하다가 오전 5시 5분 향년 32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7374
사후
1945년 8월 8일 유해는 비행기에 실려 경성비행장에 도착하였고,75 운현궁으로 운구되어 의무관들에 의하여 방부 처리되었다.76 일본인 수행 무관 요시나리 히로무(吉成弘) 중좌는 엉덩이에 부스럼이 생겨 이우를 대신하여 자동차를 타고 사령부에 미리 출근해서 피폭을 면하였지만, 부관으로서 그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 때문에 유해를 운구한 날 밤에 자살하였다.53
1945년 8월 9일 만주국 황제 푸이는 쇼와 천황에게 이우의 사망에 대한 조전(弔電)을 보내왔다.77 8월 10일 이우의 뒤를 이어 장남 이청이 공위를 계승하여 운현궁의 재산과 칭호를 상속하였고,78 8월 13일 대좌로 진급 추서되었다.79 장례식은 8월 15일 12시 경성운동장(현 동대문 운동장)에서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쇼와 천황의 항복 방송 때문에 연기되어53 오후 5시에 거행되었다.80 조선군사령부 주관의 육군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조선신궁의 궁사가 제주(祭主)로 참여하였다.81 장례식에는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제17방면군 사령관 고쓰키 요시오·일왕을 대신하여 궁내부 식부 차장 호조 도시나가가 참석하였다.82 유해는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창현리(현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에 안장되었다.8384 이우의 묘는 개별적으로 조성되어 있던 운현궁가의 묘를 한 곳에 모아 양증조부 헌의대원왕(흥선대원군)의 무덤 흥원(興園) 주변에 현대식 가족 납골묘의 형태로 다시 조성하면서 개장되었다. 묘에 있던 비석과 석물은 2004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되어 박물관 경내에 전시되고 있다. 사망한 이후에 (私諡) 흥영군(興永君)을 받게 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 제정된 《구황실재산법》에 따라 황실 재산이 국유화되지만 운현궁은 이우의 부인 박찬주가 흥선대원군의 사유 재산이었음을 호소하여 국유화에서 제외되었다. 이우의 장남 이청의 소유로 변경된 뒤에 운현궁의 대지는 분할되어 덕성학원 등에 매각되었고, 1993년 운현궁이 서울특별시에 매각되었다.86
1959년 10월 17일 이우를 가족의 동의없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하는 영새봉안제(靈璽奉安祭)가 거행되었다.76 사망자의 이름, 사망 장소, 사망 날짜 등이 적혀 있는 영새부를 야스쿠니 신사의 어신체가 있는 본전에 놓으면 영새부에 적혀 있던 인간의 혼령이 어신체에 깃들어 신령이 된다는 것이다.87 조선인 강제 합사에 대한 야스쿠니 신사의 공식적인 의견은 “사망 시점에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일본을 지킨 신으로 모시는 게 당연하다.”라는 것이다. 황족과 평민을 같은 자리에 모실 수 없다며 사망한 일본 황족을 따로 분리하여 합사하였던 야스쿠니 신사는 사망 당시 일본 제국 황족과 동등한 지위였던 이우를 일반 군인과 함께 합사하였다. 2007년에 이우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사실이 언론을 통하여 알려지면서 논란이 되었다.5376
1970년 4월 10일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히로시마 현 본부에 의해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건립되었다.88 히로시마시의 반대로 위령비의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 건립이 어려워지자89 이우가 피폭을 당한 후 발견된 장소였던 히로시마 혼가와의 아이오이 교 근처에 세워졌다. 위령비의 전면에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와 함께 ‘이우공 전하 외 2만여 영위’라는 문구가 적혀있고, 뒷면의 비문에는 ‘나라 잃은 왕손이기에 남모를 설움과 고난이 한층 더 했던 이우공 전하를 비롯하여 … 이우공 전하 외 무고한 동포 2만여 위 …’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1999년 7월 21일 위령비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안으로 이전되었다.5388
2000년대 이우의 사진과 일화가 각종 포털 사이트와 인터넷 게시판에 소개되면서 네티즌들의 주목을 받았고 ‘얼짱 황손’으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90
평가
경성유치원의 보모 교구치 사다코(京口貞子)는 “어떻게 영민하신지 벌써 일본어도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의 반 정도는 아시고 창가도 매우 잘하신다. 재주와 위엄, 풍채 모두 나무랄 수 없는 훌륭한 귀공자이시다. 기운 차고 침착하시며 영리하시고 남에게는 결코 지지 아니하시려 하는 굳센 성미이시지만 어린 아이들을 매우 잘 돌보아주신다.”라고 평하였다.9192
운현궁의 일본인 사무관은 “새로이 결정된 이준공 전하의 계자는 지난 번의 장의에서도 상주가 되셔서 태도가 훌륭하셨는데 나이는 금년 6세이시나 매우 침착하고 영리하신 성격이시다. 매우 활발하신 성격으로 어떠한 때에는 형님되시는 공자보다도 더욱 기운이 차게 보인다.”라고 평하였다.92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인 일본 황족 아사카 다카히코는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고 항상 마음 속으로 새기고 있었기 때문에 이우는 일본인에게 결코 뒤지거나 양보하는 일 없이 무엇이든지 앞서려고 노력했다.”라고 하였다.76 또한 “이우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화나면 조선어를 사용했다. 글자 쓰기도 능숙했고 노래도 잘 불렀는데 일본 노래도 했고 조선 노래도 불렀다. 싸우면 바로 조선어를 쓰니까 종잡을 수가 없었다.”라고 하였다.53 운현궁의 가정교사 가네코는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는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있어 일본 육군에서 두려워 했다.”라고 증언하였다.76
조선일보와 매일신보의 사회부 기자로 활약한 김을한은 “이건 공은 온화한 분이라 문제가 없지만, 이우 공은 측근의 말을 도무지 듣지 않아서 곤란하다.”라는 이왕직 회계과장 사토의 말을 언급하며, 일본인 사무관이 좋지 않게 말하는 것은 이우가 그만큼 영특하다는 반증이므로 만만찮은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고 평하였다.93
생숙모 이방자(사시 의민황태자비)는 “이우 공은 평소 성격이 활달하면서 명석한데다 일본에 저항적이어서 일본인들에게 말썽꾸러기였다. 일본 것에 대하여 병적이라고 할만큼 싫어하였고, 특히 일본 음식을 아주 싫어하였다. 일본의 간섭에 대해서도 사사건건 반발하는 성격이었다.”라고 하였다.94
이우가 일본 제국 육군에 복무하였고, 일본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친일 논란이 있었지만95 2009년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민족문제연구소는 사실상 볼모의 처지였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인명사전 명단에서 제외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왕공족을 포함시킬 것인가의 여부에 대해서는 편찬위원회에서도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 논의 끝에 왕공족의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지만 친일보다는 망국에 대한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묻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다만 기준에 부합하는 구체적인 친일 행위가 있는 경우에는 수록대상자로 선정하기로 정리되었다.”라고 하였다.96 이와 더불어 “왕공족은 대한제국 황실을 예우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고안한 일본 황족과 일본 화족, 조선귀족 사이의 특수한 지위로 협력에 대한 대가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면서 “공족 중 이재면(흥친왕)·이준용(영선군 이준)·이재곤·이해승·이재극 등 구체적인 매국행위를 일삼은 인사들은 친일 행적으로 사전에 수록되었으나 영친왕 이은과 이우는 사실상 볼모의 처지였음을 감안하여 제외하였다.”라고 밝혔다.97
상훈
1888년에 제정된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은 남자에게 수여되는 훈장인 욱일장의 최고위 훈장이다.101 일본 정부가 1926년 12월에 공포한 《왕공가궤범》 제58조에 따르면 “공은 만 15세가 넘으면 훈1등에 서훈되어 욱일동화대수장을 받는다”고 규정되어 있다.
대훈위 국화대수장은 일본의 최고위 훈장으로 1876년에 제정되었으며 주로 황족을 대상으로 수여되었다.103 영친왕 이은(1920년 4월 27일)104, 의친왕 이강(1924년 1월 10일)105, 이건(1940년 11월 3일)106에게도 대훈위 국화대수장이 서훈되었다.107
일본 정부는 이우가 히로시마에서 피폭되어 사망하자 육군 대좌로 진급과 함께 공3급 금치훈장을 추서하였다. 금치훈장은 일본이 1890년에 제정한 무공훈장으로 7등급으로 나뉘어 있었고, 계급에 따라 초서(初敍)의 급이 정해져 무공이 누적됨에 따라 진급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우와 같은 좌관(佐官)은 공4급에서 공2급까지의 금치훈장을 수여받을 수 있었다.108
가계
흥선대원군(헌의대원왕)의 아버지 남연군 이구는 본래 인조의 아들 인평대군의 6세손이었으나, 장조(사도세자)의 아들 은신군 이진의 사후양자로 출계 하였다. 은신군도 사후 정조의 명으로 숙종의 아들 연령군 이훤의 후사가 되었지만 세대상 조부와 손자 관계이고, 이미 낙천군 이온이 연령군의 양자로 출계한 터였다. 운현궁가에서는 가계를 장조부터 은신군을 거쳐 내려오는 계통이라는 입장을 취하였지만, 20세기 중반 이후에 봉사와 대수를 감안하여 연령군에서 낙천군을 거쳐 은신군로 이어지는 계보로 정리하였다.
조선 왕실과 운현궁 가계도
- 양부 영선군 이준(永宣君 李埈, 1870 ~ 1917)
- 양모 정경부인 남양 홍씨(南陽 洪氏, ? ~ 1894)
- 양모 정경부인 광산 김씨(光山 金氏, 1878 ~ 1955)
- 본인 이우(李鍝, 1912 ~ 1945)
- 처 박찬주(朴贊珠, 1914 ~ 1995)
- 자 이청(李淸, 1936 ~ )
- 자 이종(李淙, 1940 ~ 1966)
- 양서모 전순혁(全順爀, 1881 ~ ?)
- 양서매 이진완(李辰琬, 1916 ~ 1997)
- 양서매부 윤원선(尹源善, 1910 ~ 1971)
- 생부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1877 ~ 1955)
- 적모 의친왕비 김덕수(義親王妃 金德修, 1880 ~ 1964)
- 생모 수인당 김흥인(修仁堂 金興仁)
관련 작품
- 드라마 《왕조의 세월》 (1990년, 배우: 홍요섭)
- 연극 《운현궁 오라버니》, 남산예술센터, 2009년 12월 4일 ~ 12월 13일.
- 영화 《덕혜옹주》 (2016년, 배우: 고수)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