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당 사건
1958년 이승만 정부가 진보당 위원장 조봉암과 간부들을 국가 변란·간첩 혐의로 기소해 1959년 조봉암을 사형에 처한 사건. 2011년 대법원 재심에서 조봉암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시작~종료 1958년 1월 12일 ~ 1959년 7월 31일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상세 타임라인
개요
진보당 사건은 1958년 1월 서울시 경찰국이 진보당 간부들을 체포하면서 시작되어, 1959년 7월 31일 진보당 위원장 조봉암이 사형당하는 것으로 끝난 정치 사건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2007년 이 사건을 정치 탄압이자 인권 유린으로 판단했고, 대법원은 2011년 1월 20일 재심에서 조봉암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배경
조봉암은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약 79만 표, 1956년 5월 15일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약 216만 표를 얻어 이승만의 가장 위협적인 경쟁자로 떠올랐다. 그는 1956년 11월 10일 박기출, 김달호, 윤길중 등과 함께 진보당을 창당하고 '평화 통일'과 '수탈 없는 경제'를 내걸며 지방 조직을 넓혀 갔다. 1958년 5월 2일의 민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이승만 정부는 진보당의 원내 진출을 경계하였다.
전개
체포와 기소
서울시 경찰국은 1958년 1월 12일 윤길중, 김달호, 조규희, 이동화 등 간부를 체포하고 1월 14일 조봉암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하였다. 검찰은 2월 16일 간부들을 기소하면서, 진보당의 평화 통일론이 대한민국의 존립을 부정하고 북한의 주장과 통한다고 주장하였다. 조봉암에게는 남파 간첩과의 접선 등 간첩 혐의가 붙었다. 2월 20일에는 육군 특무부대가 대북 교역상 양이섭(양명산)이 북한의 공작금을 조봉암에게 전달했다는 '양이섭 사건'을 발표하였다. 공보실은 2월 25일 진보당의 정당 등록을 취소하였다.
1심
서울지방법원(재판장 유병진)은 3월 13일부터 7월 2일까지 재판을 진행하여, 경찰이 제기한 간첩 접선 혐의들을 사실이 아니라고 보았다. 다만 양이섭과의 금전 관계를 근거로 조봉암과 양이섭에게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5년을 선고하고, 다른 간부들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평화 통일론이 헌법 위반이라는 공소 사실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판결 뒤 반공 청년을 자처하는 무리가 법원 청사에 몰려가 판사를 비난하는 소동을 벌였다.
2심과 상고심
서울고등법원 2심(9월 4일~10월 25일)에서 양이섭은 자신의 자백이 특무대의 회유와 협박에 따른 허위였다고 진술을 뒤집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조봉암과 양이섭에게 사형을, 다른 간부들에게도 유죄를 선고하였다. 대법원은 1959년 2월 27일 조봉암의 사형을 확정하고 다른 간부들에게는 1심과 같은 취지로 무죄를 선고했다.
사형 집행
조봉암의 재심 청구는 1959년 7월 30일 기각되었다. 양이섭은 7월 29일, 조봉암은 재심 기각 다음 날인 7월 31일 서울형무소(서대문)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결과와 재평가
조봉암의 처형과 진보당의 해체로 평화 통일 논의는 공개 무대에서 사라졌고 혁신 정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2007년 9월 18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이 사건이 조봉암을 제거하려는 정권의 의도 아래 이루어졌으며, 민간인 수사권이 없는 특무대가 간첩 혐의 수사에 나선 반인권적 정치 탄압이라고 결정하였다. 이어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은 재심에서 간첩 혐의 등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였다.
이 사건은 사사오입 개헌 이후 이어진 이승만 정부의 장기 집권 시도, 그리고 1960년 3·15 부정 선거와 4·19 혁명으로 이어지는 정권 말기의 흐름 속에서 이해된다.
참고 자료
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 r414 · 문서 내용은 CC BY-SA 4.0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