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의거
1960년 3·15 정·부통령 선거의 대규모 부정에 맞서 마산 시민과 학생이 일으킨 항쟁. 3월 15일 밤 경찰 발포로 여러 명이 숨졌고, 4월 11일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2차 의거가 일어나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시작~종료 1960년 3월 15일 ~ 1960년 4월 13일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상세 타임라인
개요
3·15 의거(3·15 마산 의거)는 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제5대 부통령 선거에서 자행된 부정 선거에 항의하여 경상남도 마산에서 일어난 시민·학생 항쟁이다. 선거 당일 저녁의 1차 의거와, 4월 11일 실종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바다에서 떠오른 뒤 벌어진 2차 의거로 나뉜다. 이 항쟁은 전국적인 저항을 불러일으켜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배경: 3·15 부정 선거
이승만은 1959년 다시 출마 의사를 밝혔고 자유당은 이승만·이기붕을 정·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1960년 2월 15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미국에서 치료 중 숨지면서 이승만의 당선은 확실해졌고, 승부는 대통령 승계권을 가진 부통령 자리를 두고 이기붕과 장면 사이에서 벌어졌다.
내무부 장관 최인규는 경찰과 공무원을 동원해 이른바 4할 사전 투표, 3인조·5인조 공개 투표, 완장 부대 활용, 야당 참관인 축출 등을 통해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을 85%까지 끌어올리는 계획을 극비리에 지시했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전한다. 개표 과정에서 득표율이 95~99%로 나오는 곳이 속출하자 오히려 하향 조정을 지시했을 정도였다. 최종 집계는 이승만 88.7%, 이기붕 79%였다.
1차 의거 (3월 15일)
국가보훈부 국립3·15민주묘지가 정리한 일지에 따르면 경과는 다음과 같다.
- 오전 10시 30분, 민주당 마산시당(오동동)은 투표소에서 부정을 확인한 뒤 선거 포기와 무효를 선언하였다.
- 오후 2시 30분부터 4시 30분까지 민주당 간부 약 30명이 1차 시위를 벌였고, 불종거리에서 약 600명이 경찰과 대치하며 투석이 시작되었다.
- 오후 6시 30분 무학초등학교에서 마산도립병원에 이르는 길에 수천 명이 모여 경찰과 충돌하였다.
- 오후 8시 무렵 소방차가 전신주를 들이받아 마산 시내가 정전되었다.
- 오후 8시 10분 시청 앞과 남성동 파출소 앞에서 경찰이 발포하였다.
- 오후 9시 경찰이 시청, 남성동 파출소, 북마산 파출소 일대에서 무차별 사격을 하였다. 이어 시위대는 북마산 파출소에 불을 지르고(오후 9시 30분경)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의 집 등을 공격하였으며, 밤 11시 30분경 해산하였다.
같은 일지는 이날 사망자를 8명, 부상자를 수십 명, 연행·구금자를 수백 명으로 적고 있다. 사망자 수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어 위키백과는 7명에서 13명까지 서로 다른 수치를 함께 소개하고 있다.
김주열과 2차 의거 (4월 11일~13일)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김주열은 마산상고 입학시험을 치르고 합격자 발표를 하루 앞둔 3월 15일 형과 함께 시위에 나갔다가 행방불명되었다. 27일 뒤인 4월 11일 오전 11시경 그의 시신이 마산 신포동 중앙부두 앞바다에 떠올랐다. 시신의 눈 부위에는 3월 15일 경찰이 군중을 향해 쏜 최루탄이 박혀 있었고, 경찰은 책임을 피하려고 시신을 바다에 버렸던 것으로 드러났다.
소식이 퍼지자 시민들이 시신이 안치된 마산도립병원으로 몰려들었다. 국립3·15민주묘지 일지에 따르면 오후 5시 무렵부터 시내 곳곳에서 시위가 다시 시작되었고, 저녁 7시에는 약 3만 명이 도립병원 앞에 모여 시청과 경찰서 등으로 몰려갔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시위대 형성 시점을 오후 6시경으로 적는다). 밤 8시 30분경 경찰의 발포로 2명이 숨졌다. 4월 12일에는 마산 시내 고등학생과 대학생 약 3천 명과 시민 1만여 명이 시위를 벌였고, 13일에도 학생 시위가 이어졌다.
결과와 의의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의 사진은 신문을 통해 전국에 알려져 큰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4월 18일 고려대생 시위와 4월 19일 전국적인 봉기로 이어졌다. 4·19 이후 부정 선거 책임자들은 재판에 회부되었고, 최인규는 발포 명령 책임 등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1960년 4월 14일 김주열은 고향 남원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2003년 3·15 의거를 국가 기념일로 지정했으며, 마산에는 국립3·15민주묘지가 조성되었다.
참고 자료
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 r416 · 문서 내용은 CC BY-SA 4.0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