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의병
1907년 고종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맞서 해산 군인과 농민·유생이 전국에서 일으킨 항일 의병 전쟁.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 작전으로 이어졌으나 일본군의 대토벌로 국내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시작~종료 1907년 8월 1일 ~ 1909년 10월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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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정미의병은 1907년(정미년) 8월 대한제국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일어나 1909년 무렵까지 전국에서 벌어진 항일 의병 운동이다. 1895년 을미의병, 1905년 을사의병에 이은 세 번째 의병 봉기로, 해산 군인이 합류하면서 무장과 전술이 크게 강화되었고 사실상 '의병 전쟁'의 양상을 띠었다. 평민 출신 의병장의 활약이 두드러졌으며, 1907년 말에는 전국 의병 연합 부대인 13도 창의군이 결성되어 서울 진공 작전을 시도했다.
배경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1907년 7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을 강요했다. 협약에 딸린 비밀 각서에 따라 순종은 7월 31일 군대 해산 조칙을 재가해야 했고, 8월 1일 서울의 시위대 해산을 시작으로 지방 진위대까지 차례로 해산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일신협약」).
전개
시위대 봉기와 남대문 전투 (1907년 8월 1일)
8월 1일 아침 훈련원에서 해산식이 열리던 날,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이 해산에 항의해 자결했다. 이 소식을 들은 시위대 병사들이 무기를 들고 봉기해, 남대문 일대에서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였다. 제2연대 제1대대 병사들도 합세했다. 병사들은 탄약이 떨어지면서 일본군의 기관총과 포격에 밀려 많은 사상자를 내고 흩어졌으며, 살아남은 병사들 가운데 상당수가 지방 의병에 합류했다.
지방 진위대의 봉기
- 원주: 원주 진위대의 특무 정교 민긍호는 8월 초(8월 2일설·5일설 등이 있다) 해산에 앞서 약 3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봉기해 원주의 일본 우편 취급소와 경찰을 습격하고 3시간 동안 싸웠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민긍호」). 민긍호 부대는 이후 제천·죽산·장호원·여주·홍천 등지에서 100여 차례 전투를 벌인 강원도 최대의 의병 부대가 되었다. 민긍호는 1908년 2월 29일 붙잡혀 살해되었다.
- 강화: 강화 분견대 병사들도 봉기해 일본군과 싸웠다.
- 이강년(문경·제천), 신돌석(영해·영덕), 홍범도·차도선(함경도 산포수) 등이 각지에서 활약했다. 특히 신돌석·홍범도 같은 평민 의병장이 대두한 것이 이 시기의 특징이다.
13도 창의군과 서울 진공 작전 (1907년 말~1908년 초)
1907년 말 원주에서 거병한 이은찬·이구채 등이 문경의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그의 격문에 따라 전국 의병이 경기도 양주에 모여 13도 창의군을 결성했다. 위키백과는 해산 군인 약 3,000명을 포함해 1만 명 안팎이 모였다고 적는다. 총대장 이인영, 군사장 허위가 지휘를 맡았다. 이들은 서울의 각국 영사관에 의병을 국제법상 교전 단체로 인정해 달라는 통문을 보내고 서울로 진격하려 했으나, 1908년 1월 허위가 이끈 선발대가 동대문 밖에서 일본군에 패하면서 작전은 실패했다(서울 진공 작전).
호남 의병과 남한 대토벌 (1908~1909)
1908년 이후 의병의 중심은 전라도로 옮겨 갔다. 일본은 1909년 9월부터 약 2개월 동안 이른바 '남한 대토벌 작전'을 벌여 전라도 일대를 포위하고 마을을 초토화하며 의병을 잔혹하게 진압했다. 이후 국내 의병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고, 남은 의병은 만주와 연해주로 옮겨 독립군의 바탕이 되었다.
규모와 피해
일본 측 기록(『조선폭도토벌지』)에 따르면 1907년 8월부터 1911년 6월까지 의병과 일본군의 충돌은 2,800여 회에 이르고, 이 기간 의병 사망자는 1만 7,000여 명으로 집계된다. 이는 일본 측 집계로, 실제 피해는 더 컸을 것으로 보인다. 1907년 영국 『데일리 메일』 기자 매켄지는 양평 등지에서 의병을 직접 만나 그 실상을 서방에 전했다.
의의
정미의병은 해산 군인의 참여로 전투력이 높아졌고, 계층적으로도 유생 중심에서 농민·포수·해산 군인 등으로 확대되었다. 국내 의병 전쟁은 좌절되었지만, 그 인적·조직적 역량은 1910년대 이후 만주·연해주의 무장 독립 전쟁으로 이어져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바탕이 되었다.
관련 인물
- 박승환(1869~1907):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군대 해산에 항의해 자결했다.
- 민긍호(?~1908): 원주 진위대 특무 정교 출신 의병장. 강원도 최대 의병 부대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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