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 (1527년)
이탁오(李卓吾: 1527년 11월 19일[음력 10월 26일]~1602년 5월 7일[음력 3월 16일])는 중국 명나라의 양명좌파 사상가이다. “잘나신 나”라는 뜻의 “탁오”는 자이고, 휘는 이지(李贄)다. 호는 온릉(溫陵)이었다. 초명은 임재지(林載贄)였으나 이후에 종가의 성(姓)을 따라 이지로 개명했다. 복건성(福建省) 천주부(泉州府) 진강현(晋江縣)(오늘날 푸젠성 취안저우) 출신이다. 유학자이면서 이슬람교도였으며, 당대 성리학자들로부터 기행을 한다고 비난을 받았다.
출생~사망 1527년 11월 23일 ~ 1602년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후 2:12
문서 정보
- 출생 ~ 사망
- 1527년 11월 23일 ~ 1602년
- 본명
- 이지(李贄)
- 출생
- 1527년 11월 19일, 복건성 천주부 진강현
- 사망
- 1602년 5월 7일
- 성별
- 남성
- 국적
- 중국
- 직업
- 양명좌파 사상가, 유학자
- 종교
- 이슬람교
- 위치
- 24.8141, 118.5792
이탁오(李卓吾: 1527년 11월 19일[음력 10월 26일]~1602년 5월 7일[음력 3월 16일])는 중국 명나라의 양명좌파 사상가이다. “잘나신 나”라는 뜻의 “탁오”는 자이고, 휘는 이지(李贄)다. 호는 온릉(溫陵)이었다.1 초명은 임재지(林載贄)였으나 이후에 종가의 성(姓)을 따라 이지로 개명했다. 복건성(福建省) 천주부(泉州府) 진강현(晋江縣)(오늘날 푸젠성 취안저우) 출신이다. 유학자이면서 이슬람교도였으며, 당대 성리학자들로부터 기행을 한다고 비난을 받았다.
생애
이탁오의 관직 생활은 하남성·북경·남경의 하급 관리 및 남경형부원외랑(南京刑部員外郞)을 거쳐, 51세 때 운남성 요안부(姚安府)의 지부(知府)가 되었다가 쉰네 살 때 그만둔 것이 전부이다.
<자찬(自贊>에서 이탁오는 자신의 성질은 편협하고, 성급하며, 얼굴 표정은 거만하고, 마음은 미치광이라고 스스로 평했다. 사람들과 교제 범위는 아주 좁고, 만나면 매우 친밀해지지만, 상대를 미워하면 그와 절교하고 나아가 평생 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는 따뜻한 옷, 풍성한 음식을 바라지만 절개를 지키기 위해 굶어 죽은 백이와 숙제를 담고자 한다는 등, 이상과 실상, 말과 행동, 즉 입과 뱃속이 몹시 다르다고 했다. 이러한 자기 평가를 말 그대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 여기엔 반어적 분위기가 넘쳐난다. <고결설>에서 그는 고결함을 좋아하기에 오만하고 성급하며 마음이 좁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는 권세나 부 등 외적인 것에는 일절 신경 쓰지 않고,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내적인 것(착하고 좋은 점)만을 바라보려 애썼다.1
이탁오의 성격은 지극히 독선적인 데다가 외곬수였다. 그는 사람들과 시비를 즐겼으며, 매사에 도전적이고 전투적으로 대했다. 게다가 기행을 좋아하고, 반유교적이고 파괴적 언사를 자주 써서 당대 사회에서 큰 주목을 끌었다. 결국, 그는 당대 명나라 사상계에서 이단으로 몰리게 되었다. 1602년(만력 30년) 부패한 관료층의 탄압을 받아 '도를 혼란케 하고 세상을 미혹하게 했다'라는 죄목을 받아 사상범으로 체포되었고, 옥중에서 목을 베어 자결했다. 향년 76세였다.1
이탁오는 양명학의 창시자인 왕양명(王陽明)과 왕기(王畿)를 도를 얻은 진인(眞人)의 불사자(不死者)라면서 존숭했다. 그의 사상에서 〈동심설(童心說)〉, 역사 비판에서 선악과 현부(賢否)의 상대화 등은 양명학의 발전이면서 동시에 나 노장 사상의 영향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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