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성 전투
1597년 음력 12월 23일부터 1598년 1월 4일까지 명의 양호·마귀와 도원수 권율의 조명연합군 약 5만 명이 가토 기요마사가 지키던 울산 도산성(울산왜성)을 포위 공격했으나 일본 구원군이 오자 물러난 전투.
시작~종료 1598년 1월 29일 ~ 1598년 2월 9일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상세 타임라인
개요
울산성 전투(도산성 전투)는 1597년 음력 12월 23일(양력 1598년 1월 29일)부터 1598년 음력 1월 4일(양력 2월 9일)까지 경상도 울산의 도산성(島山城, 울산왜성, 지금의 울산 중구 학성공원 일대)에서 벌어졌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유재란」에 따르면 명의 경리 양호(楊鎬)가 이끈 약 4만 명과 도원수 권율의 약 1만 명 등 5만 명 정도가 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였다. 이 문서는 주로 이 1차 공격을 다루며, 1598년 9월의 2차 공격은 사로병진 작전에서 다룬다.
배경
직산과 명량에서 막힌 일본군은 남해안으로 물러나 왜성을 쌓았다.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 태화강 하구 언덕에 새 성을 쌓기 시작하였으나, 겨울이 되도록 완공하지 못한 상태였다. 명은 정유재란 뒤 경리 양호와 제독 마귀(麻貴)를 보내 대군을 편성하였고, 일본군의 동쪽 거점인 울산을 먼저 치기로 하였다.
경과
- 12월 22~23일: 조명연합군이 경주에서 남하하였다. 명의 부총병 해생 등이 먼저 울산의 일본군을 공격하였고(『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울산전투」), 성 밖에 나와 있던 일본군이 큰 피해를 입고 성안으로 물러났다. 가토 기요마사는 서생포에 있다가 급히 배를 타고 도산성에 들어왔다.
- 포위: 연합군은 성을 겹겹이 둘러싸고 여러 차례 성벽을 기어올랐으나, 높은 석축과 일본군의 조총 사격에 막혀 큰 피해를 입었다. 위키백과는 연합군이 신기전과 화차 등도 썼다고 적는다.
- 농성의 고통: 성안의 일본군은 미처 식량과 물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포위되어, 추위와 굶주림, 갈증에 시달렸다. 말을 잡아먹고 종이를 씹으며 버텼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위키백과는 열흘쯤 지나 일본군이 강화를 청했다고 적는다.
- 구원군: 서생포·양산·부산 등지의 일본군이 구원에 나섰다. 위키백과는 모리 히데모토, 구로다 나가마사,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등의 육군과 조소카베 모토치카 등의 수군을 합쳐 1만 3천 명 정도로 적는다.
- 1월 3~4일: 마귀가 다시 공격하였으나 이미 사기가 떨어진 연합군은 성을 넘지 못하였다. 구원군이 다가오자 양호는 포위를 풀고 큰비 속에 경주 쪽으로 물러났고, 일본군은 30리 넘게 추격하였다.
결과와 영향
울산성 공격은 실패로 끝났고, 연합군은 철수하는 길에 큰 피해를 입었다. 사상자는 기록마다 크게 달라, 위키백과는 조선 측 기록을 인용해 명군 전사 700명·부상 3,000명 이상, 다른 기록에서 3,000~4,000명 전사 등으로 소개한다. 양호는 패전을 숨기고 승리로 보고하였다가 뒤에 탄핵되어 소환되었다. 이 싸움 뒤 일본군 지휘부 안에서는 전선을 줄이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히데요시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도산성은 1598년 9월 사로병진 때 마귀의 동로군에게 다시 공격받았으나 이때도 함락되지 않았다.
이설
병력과 사상자 수, 공격 날짜의 세부는 자료마다 다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유재란」은 공격을 12월로만 적으며, 위키백과는 1차 전투를 양력 1598년 1월 29일~2월 9일로 적는다.
참고 자료
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 r273 · 문서 내용은 CC BY-SA 4.0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