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선진리성
사천선진리성(泗川船津里城)은 경상남도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에 있는 정유재란 때 일본군이 쌓은 일본식 성곽(왜성)이다. 일제강점기때 1936년 5월에는 고적 제81호로 지정됐으며, 그 후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0호로 지정되었으나 왜성이라는 이유로 1998년 9월 8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274호로 격하되었다.
조성 연도 미상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후 2:19
문서 정보
- 조성
- 연도 미상
- 종목
- 문화재자료 제274호 , (1998년 11월 13일 지정)
- 수량
- 일원
- 소유
- 사천시
- 관리
- 사천시
- 참고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 좌표
- 북위 35° 2′ 29″ 동경 128° 2′ 52″
- 정보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정보
- 위치
- 35.0414, 128.0478
사천선진리성(泗川船津里城)은 경상남도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에 있는 정유재란 때 일본군이 쌓은 일본식 성곽(왜성)이다. 일제강점기때 1936년 5월에는 고적 제81호로 지정됐으며, 그 후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0호로 지정되었으나 왜성이라는 이유로 1998년 9월 8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274호로 격하되었다.
현지 안내문
경상남도 사천시 사천읍 선진항의 북방에 있는 이 성은 삼면이 바다에 접하고 동쪽만 육지에 닿아 있는 반도 지형에 세워졌다.1
조선시대에는 항구로 유명했으며 선진이 설치되기도 하였는데, 선진은 싸움터에서 앞장서는 군대를 뜻한다. 『읍지』와 『대동지지』의 기록을 보면 이 선진에는 전함이 1척, 병선이 1척, 하후선이 2척 있었다고 하여, 삼천진이라 불렸다. 선조 30년(1597)에 왜의 석만자가 이곳에서 지내면서 울산의 도산, 순천의 왜교와 더불어 3굴이라 불렀다고 한다.1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지은 성으로, 규모나 구조면에서 볼 때 활동의 주요 근거지로 만들어진 것이며, 이순신 장군에 의해 격파 당하기도 하였다. 현재 흙으로 쌓은 성벽이 1㎞가량 남아 있으며, 돌로 만든 누(樓)는 무너졌으나 대체로 성의 규모대로 터가 남아 있다.1
개요
사천선진리성은 사천읍에서 약 7km 서남쪽에 위치한 평산성이다. 바다와 가까운 지리적 이점 때문에 고려 시대부터 조창이 설치되어 주변에 토성을 쌓았다.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조창 터에 왜성을 쌓아 주둔하였고, 뒤이어 정유재란 때 성주변에서 일본군과 조명연합군의 큰 싸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성 주변은 선진공원으로 정비되었고, 일부는 농지로 변해있다. 두 차례의 시·발굴조사에서 왜성의 성벽(석원)이 확인되었으며, 500×600cm의 북곽이 딸린 ‘ㄱ’자 형태의 천수각과 폭 150cm의 문설주가 설치된 왜성 문지(호구), 주거지 2기, 수혈 70여기가 조사되었는데 목책열로 추정된다. 출토유물은 와편이 주류를 이루고 문양은 무문양, 사격자문, 복합문, 어골문 등이 시문되어 있다.
역사
고려 시대 초기 남도수군의 조창중 하나인 통양창(通陽倉)이 있어 이 지역은 통양포 또는 통조포로 불렸으며 조창을 방어하기 주변에 토성을 쌓았다. *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 통조포로 지명이 굳어졌고, 조창은 통양창(通洋倉)으로 개명되었다. 태종 3년(1403년) 통양창에 왜구가 출몰하자 조세운송은 해로에서 육로로 바뀌었으며 통양창의 역할은 축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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