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성 전투
1592년 음력 4월 15일 동래부사 송상현이 군민과 함께 동래읍성을 지키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에게 함락당하고 전사한 전투.
시작 1592년 5월 25일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상세 타임라인
개요
동래성 전투는 부산진 전투 다음 날인 1592년 음력 4월 15일(양력 5월 25일),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이 지키던 동래읍성(지금의 부산광역시 동래구)을 일본군 제1군이 공격하여 함락한 싸움이다. 송상현은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전사하여 임진왜란 초기 항전의 상징이 되었다.
배경
부산진이 무너지자 경상좌병사 이각이 동래성에 들어왔으나, 곧 성 밖에서 돕겠다는 핑계로 빠져나가 소산역 쪽으로 물러났다. 경상좌수사 박홍도 싸우지 않고 물러났다. 송상현은 고을 군사와 백성을 모아 성을 지켰다.
경과
- 4월 15일 아침: 고니시의 군이 동래성 남문 밖에 이르러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 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는 글을 내걸었다. 송상현은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 주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고 답했다고 전한다(『징비록』 등).
- 공격: 일본군은 성을 포위하고 조총을 쏘며 성벽을 넘었다. 성안의 군민은 활과 돌, 기왓장까지 던지며 맞섰다.
- 함락: 반나절가량의 싸움 끝에 성이 함락되었다. 송상현은 갑옷 위에 조복을 입고 단정히 앉아 최후를 맞았다고 하며, 양산군수 조영규, 교수 노개방 등도 함께 죽었다. 성안에서 많은 백성이 살해되었다.
결과와 영향
동래성 함락으로 일본군은 경상도 내륙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었다. 고니시의 군은 이튿날부터 양산·밀양 방면으로 북상하였다. 일본 측도 송상현의 의기를 높이 사 장례를 치러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1731년 동래부사 정언섭이 성을 다시 쌓았으며, 2005년 부산 지하철 수안역 공사 중 동래읍성 해자에서 당시 희생된 사람들의 유골과 무기가 대량으로 발굴되어 치열했던 싸움을 보여 주었다. 송상현은 뒤에 이조판서·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렬(忠烈)이며, 동래 충렬사에 모셔졌다.
이설
송상현과 고니시 사이에 오간 글귀는 『징비록』 등 후대 기록에 전하는 것으로, 정확한 문구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다.
참고 자료
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 r239 · 문서 내용은 CC BY-SA 4.0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