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여지도 간행
1861년(철종 12) 지리학자 김정호가 전국을 남북 22층으로 나눈 목판본 지도첩 『대동여지도』를 펴낸 일. 접고 펼 수 있는 분첩절첩식에 기호를 체계적으로 써서 조선 지도학의 최고봉으로 평가된다.
시작 1861년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개요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간행은 1861년(철종 12) 조선 후기의 지리학자 고산자 김정호(金正浩)가 목판으로 찍은 전국 지도첩을 펴낸 일이다. 한반도를 남북 22층으로 나누어 각 층을 병풍처럼 접을 수 있게 만든 '분첩절첩식' 지도로, 모든 층을 이어 붙이면 하나의 대형 전국 지도가 된다. 산줄기를 이어 그리는 독특한 표현법과 체계적인 기호를 사용했고, 특히 군사 관련 정보를 강조했다. 오늘날 국내외에 30여 점이 전하며,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서울역사박물관·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배경
김정호
김정호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그가 1804년(순조 4) 무렵 태어나 1866년(고종 3) 무렵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정한다. 그는 지도 제작과 함께 국토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지리지 편찬에도 힘을 쏟아 『청구도』, 『동여도』, 『대동지지』 등을 남겼다.
축적된 지도학
김정호는 고위 관료 신헌의 도움으로 조정에 보관된 많은 지도와 서적을 볼 수 있었고, 서양 학문에 밝은 친구 최한기와의 교류를 통해 서양 과학도 접했다. 그는 1834년(순조 34) 지도책 『청구도』를 만들었고, 같은 해 최한기의 부탁으로 서양식 세계 지도 「지구전후도」의 목판을 새겼다. 『동여도지』, 『여도비지』, 『대동지지』 같은 방대한 지리서도 저술했다. 『대동여지도』는 이렇게 쌓인 경험과 지식, 그리고 조선 지도학의 성과를 종합한 결과였다.
내용
형식
『대동여지도』는 22첩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반도를 남북 22층으로 나누고 각 층을 남북 120리, 동서 80리 단위로 접을 수 있게 했다. 접었을 때 한 첩의 크기는 가로 20cm, 세로 30cm이다. 기존의 책 형태 지도와 달리 필요한 부분만 펼쳐 볼 수 있어 휴대와 열람이 편리했다.
남북 22층에 층마다 120리이므로 전체 남북 길이는 2,640리가 된다. 이는 『청구도』의 2,900리보다 260리 짧은데, 목판을 아끼려고 남해안과 제주도 사이의 바다를 의도적으로 줄였기 때문이다.
축척과 방안
지도는 10리 방안을 기준으로, 실제 10리를 지도 위 2.5cm로 나타냈다. 그러나 근대적 측량과 투영법에 따른 지도가 아니고 지역마다 정확도가 달라, 정확한 축척을 계산하기는 어렵다. 『청구도』처럼 경위선표를 바탕으로 했는데, 여기서 경위선은 현대의 경위도가 아니라 평면에 그은 바둑판 모양의 방격이다.
표현
산을 하나하나 그리지 않고 산줄기를 연결해 굵기로 높낮이와 규모를 표현했으며, 물줄기는 배가 다닐 수 있는 곳을 겹선으로 구분했다. 고을·역참·창고·봉수·성곽 등을 기호로 표시하고, 도로에는 10리마다 점을 찍어 거리를 알 수 있게 했다.
이설·논쟁
- 백두산 답사설: 김정호가 전국을 직접 답사하고 백두산을 여러 번 오르내리며 측량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으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근거가 거의 없다고 본다. 국가의 지원 없이 개인이 전통 방식으로 전 국토를 측량해 이처럼 정밀한 지도를 그리기는 불가능하며, 기존 성과를 종합해 만든 것이라는 설명이다.
- 목판 소각설: 흥선대원군이 나라의 기밀을 누설했다며 목판을 불태우고 김정호를 옥에 가두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지도 목판이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1매, 국립중앙박물관에 11매 남아 있어 근거가 없다고 한다.
의의
『대동여지도』는 조선 전통 지도학을 집대성한 성과로, 정확성과 실용성, 휴대성을 함께 갖춘 지도로 평가된다. 목판으로 찍어 여러 부를 보급할 수 있게 한 점도 지도를 국가 기밀로 여기던 관행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이 문서의 지도 위치는 김정호가 활동한 서울을 대략적으로 표시한 것이다.
참고 자료
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 r309 · 문서 내용은 CC BY-SA 4.0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