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서
김경서(金景瑞, 1564년~1624년)는 조선 중기의 무관이다. 개명 전 이름은 응서(應瑞)이다. 임진왜란 이후 개명했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자는 성보(聖甫), 시호는 양의(襄毅)이다.
출생~사망 1564년 ~ 1624년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1:35
문서 정보
- 출생 ~ 사망
- 1564년 ~ 1624년
- 휘
- 경서(景瑞)
- 자
- 성보(聖甫)
- 시호
- 양의(襄毅)
- 출생일
- 1564년
- 사망일
- 1624년
- 학력
- 1583년(선조 16년) 무과 급제
- 본관
- 김해
- 사당
- 남포 룡강군 충렬사(忠烈祠)
- 충성
- 조선
- 복무
- 조선군
- 복무기간
- 1592년 ~ 1624년
- 근무
- 전라도병마절도사, 정주목사, 평안도병마절도사
- 최종계급
- 평안도 병마절도사
- 주요 참전
- 임진왜란, 제3차 평양성 전투 제4차 평양성 전투 정유재란, 제2차 울산성 전투 명청 전쟁, 심하 전투 부차 전투
- 서훈
- 우의정 추증
- 위치
- 38.8571, 125.4220
김경서(金景瑞, 1564년~1624년)는 조선 중기의 무관이다. 개명 전 이름은 응서(應瑞)이다. 임진왜란 이후 개명했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자는 성보(聖甫), 시호는 양의(襄毅)이다.
생애
생애 초기
1561년(명종 19년) 평안도 용강에서 아버지 김인용(金仁龍)과 어머니 나주 정씨(羅州 鄭氏)의 아들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증조부 김몽하(金夢河)가 항해도 황주에서 용강으로 이주하여 살았고 생원(生員)에 합격하고 학행으로 '부자(夫子)'로 칭송받았다. 조부 김계식(金繼植)과 아버지 김인용(金仁龍)은 현감 벼슬을 지냈다. 어머니는 부장을 지낸 정열(鄭烈)의 딸이다.
평양지(平壤誌)에 의하면 어머니 정씨부인이 어느날 꿈에 오석산(烏石山)에서 한줄기의 서광이 일어나 김인용의 집까지 길게 뻗어 날아드는 것을 보고 태기가 있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용맹하여 항상 전쟁놀이를 즐겨했고, 독학으로 병서를 탐독 했으며, 15세에는 시작(詩作)에도 능하여 장부가를 불러 청년들이 즐겨 따라 불렀다고 한다. 그때 부터 황룡산성(黃龍山城)을 오르내리며 체력을 키우고 1583년 20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부위(副慰)가 되어 전라도 이진(利津)의 권관으로 첫 부임했다. 1588년 감찰(監察)이 되었으나 가문이 미천하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파직되었다.
임진왜란
29세가 되던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다시 재등용되어 그 해 8월 조방장(助防將)으로 평양 공략에 나섰으며, 싸움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워 평안도 방어사에 승진되었다. 1593년 1월 명나라의 이여송(李如松)의 원군과 함께 제4차 평양성 전투에서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이때 계월향(桂月香)이 평양성 잠입을 도와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의 목을 벤 일이 유명하다.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어 도원수 권율(權慄)의 지시로 남원 등지에서 날뛰는 토적들을 소탕하였다. 1595년 경상우병사로 전임하고 이때 가토 기요마사의 좌선장군 사야가(沙也哥)가 그의 휘하에 들어갔다.
선조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이틀 만에 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宋象賢)의 관을 적진에서 찾아오라고 하자 그는 송산현의 집안일하는 사람을 시켜 일을 성사시켰다. 그는 또한 군관 이홍발(李弘發)을 에 잡입시켜 일본군의 동태를 살피게하고, 일본 간첩 를 매수해 정보를 수집하기도 하였다. '가 바다를 건너올 것’를 입수하고, 이를 조정에 장계로 보고한다. 조정에서는 요시라의 정보를 믿고 에게 출동 명령을 내렸지만, 이순신은 이를 거부하여 파직되고 투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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