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멸망
기원전 109년 한 무제가 수군(누선장군 양복)과 육군(좌장군 순체)으로 위만조선을 침공했고, 1년 가까운 항전과 지배층 내분 끝에 기원전 108년 여름 우거왕이 암살되고 왕검성이 함락되어 고조선이 멸망했다.
시작~종료 기원전 109년 ~ 기원전 108년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목차
상세 타임라인
개요
고조선 멸망은 한(漢) 무제가 기원전 109년(원봉 2년) 가을 위만조선을 침공해, 이듬해인 기원전 108년(원봉 3년) 여름 수도 왕험성(王險城, 왕검성)을 함락시킨 전쟁이다. 『사기』 권115 조선열전이 거의 유일한 상세 기록이며, 『한서』 조선전은 이를 거의 그대로 옮겼다. 고조선은 한의 대군을 맞아 초전에서 연승했으나, 장기 포위 속에 대신들이 잇달아 투항하고 왕이 암살되면서 무너졌다. 한은 그 땅에 낙랑·진번·임둔·현도의 4군을 두었다.
날짜 표기: 원전에는 '가을', '여름'처럼 계절만 나온다. 당시 한은 태초력(기원전 104) 이전의 역법을 써서 10월을 한 해의 시작으로 삼았으므로, 이 문서는 연도만 표기하고 계절은 본문에 적는다. 위치: 왕검성은 평양 대동강 일대로 보는 견해가 통설이며, 지도도 이에 따랐다. 요동설 등 이설은 아래에 정리했다.
배경
위만조선과 한의 갈등
위만은 한의 외신(外臣)이 되어 주변을 복속시켰으나, 손자 우거왕(右渠王) 때에 이르러 관계가 틀어졌다. 『사기』는 우거가 한에서 도망 온 사람들을 많이 받아들이고, 한 번도 한 황제에게 입조하지 않았으며, 진번 곁의 여러 나라가 한에 글을 올리려는 것을 가로막았다고 적었다. 한 무제 입장에서 위만조선은 동방 교역로를 쥐고 있었고, 흉노와 연결될 가능성도 있는 위험한 세력이었다. 이 무렵 한은 남월(기원전 111)과 동월(기원전 110)을 잇달아 정복한 상태였다.
섭하 사건
기원전 109년 한은 사신 섭하(涉何) 를 보내 우거를 꾸짖고 타일렀으나 우거는 끝내 조서를 받들지 않았다. 섭하는 돌아가는 길에 국경인 패수(浿水)에 이르러, 자신을 배웅하던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을 마부를 시켜 찔러 죽이고 곧바로 강을 건너 요새 안으로 달아났다. 그는 무제에게 "조선 장수를 죽였다"고 보고했고, 무제는 이를 공으로 여겨 섭하를 요동 동부도위(東部都尉)로 임명했다. 이에 원한을 품은 조선이 군사를 보내 섭하를 습격해 죽이자, 무제는 전쟁을 결정했다.
전개
한군의 편성과 진군
무제는 죄수를 모집해 군대를 꾸렸다. 그해 가을 누선장군 양복(楊僕) 은 제(齊) 지역에서 배를 띄워 발해(渤海)를 건너고, 좌장군 순체(荀彘) 는 요동에서 출발하여 우거를 치게 했다. 『사기』의 "兵五萬人"이라는 병력 수는 문장 끊어 읽기에 따라 양군 전체로도, 순체의 육군으로도 읽힌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조선」 항목은 육군 5만, 수군 7천으로 정리한다. 수군 7천은 양복이 이끌고 먼저 왕검성에 도착한 '제나라 군사 7천'을 가리킨다.
초전의 고조선 승리
우거는 군사를 내어 험한 곳에서 막았다. 순체 휘하의 졸정(卒正) 다(多)가 요동 군사를 이끌고 먼저 나섰다가 패해 흩어졌고, 다는 도망쳐 돌아왔다가 군법에 따라 참수되었다. 한편 양복은 제나라 병력 7천으로 먼저 왕검성에 이르렀는데, 우거는 성을 지키다가 누선군이 적은 것을 알아채고 성 밖으로 나가 공격했다. 누선군은 패하여 흩어졌고, 양복은 군사를 잃은 채 산속으로 10여 일을 숨어 다니다가 흩어진 병사를 조금씩 다시 모았다. 순체도 패수 서쪽의 조선군을 공격했으나 깨뜨리지 못했다.
협상의 결렬
두 장군이 성과를 내지 못하자 무제는 위산(衛山)을 보내 군사적 압박을 배경으로 우거를 회유하게 했다. 우거는 사자에게 머리를 조아려 "항복하고 싶었으나 두 장군이 속여 죽일까 두려웠다"며 항복을 청하고, 태자를 보내 사죄하면서 말 5천 필과 군량을 바치게 했다. 그런데 태자를 따르는 1만여 명이 무기를 든 채 패수를 건너려 하자, 위산과 순체는 변란을 의심해 이미 항복했으니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요구했다. 태자 역시 자신을 속여 죽일까 의심하여 끝내 강을 건너지 않고 돌아갔다. 위산이 돌아와 보고하자 무제는 위산을 처형했다.
왕검성 포위
순체는 패수 일대의 조선군을 깨뜨리고 전진하여 왕검성 아래에 이르러 성의 서북쪽을 포위했고, 양복도 와서 성의 남쪽에 진을 쳤다. 그러나 우거가 굳게 지켜 몇 달이 지나도 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한군 지휘부의 분열
『사기』는 두 장군의 불화를 자세히 적었다. 순체는 황제의 총애를 받던 시중(侍中) 출신으로 연·대 지역의 사나운 병사를 거느렸고, 승리에 들떠 교만했다. 반면 양복의 제나라 병사들은 바다를 건너며 이미 많이 잃었고 첫 싸움에서 패해 사기가 떨어져 있었으므로, 양복은 늘 화친 쪽으로 기울었다. 조선 대신들은 몰래 양복과 항복 조건을 오갔으나 결정을 미루었다. 순체가 함께 공격하자고 여러 차례 기일을 정해도 양복은 응하지 않았고, 순체도 따로 항복을 받아내려 했으나 조선은 양복 쪽에 마음을 두었다. 순체는 양복이 패전의 죄를 가리려 조선과 내통한다고 의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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