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순
고순(高順, ? ~ 199년 2월 7일)은 중국 후한 말의 무장이다.
출생~사망 연도 미상 ~ 199년 2월 7일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후 2:20
문서 정보
- 출생 ~ 사망
- 연도 미상 ~ 199년 2월 7일
- 사망
- 199년 2월 7일
- 성별
- 남성
- 국적
- 후한
- 직업
- 무장
고순(高順, ? ~ 199년 2월 7일(198년 음력 12월))은 중국 후한 말의 무장이다.
생애
고순은 여포(呂布)의 부장으로, 그에 관한 기록은 《후한서》(後漢書)의 여포전(呂布傳), 《삼국지》(三国志) 여포전의 기타, 양쪽 책에서 주석을 모은 《영웅기》(英雄記), 《구주춘추》(九州春秋) 등에 산재되어 있다.
건안(建安) 원년(196년) 6월, 여포가 하비(下邳)를 유비(劉備)에게서 빼앗은 지 얼마 안 돼, 여포의 부장 학맹(郝萌)이 반란을 일으켰다.1 이때 도독(都督)2 고순은 자신의 병영(兵営)에 여포를 데려와 보호하고, 재빨리 학맹의 부대에 화살로 일제사격을 퍼부어 반란을 진압했다.
건안 2년(197년) 개양(開陽)에 주둔 중인 장패(臧覇)가 낭야상(琅邪相) 소건(蕭建)을 공격해 격파하고 거(莒)를 점령하자, 그 시기 이미 소건을 아군으로 끌여들였던 여포는 분노하여 장패를 공격하였다.3 고순은 “앉아서 기다리시면 장패는 항복할 것입니다.”라는 충고를 여포에게 진언하였으나, 여포는 이를 듣지 않고 장패를 공격하지만, 그의 견고한 성과 저항에 부딪혀 병력만 소모한 채 하비로 돌아왔다. 결국 얼마 후에 여포와 장패는 서로 화해했다.
건안 3년(198년)9월에는 중랑장(中郞將)으로서 장료(張遼)를 이끌고, 유비,관우,장비가 지키고 있던 패성(沛城)을 공략해 유비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그러고는 유비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조조(曹操)의 부장 하후돈(夏侯惇)과 싸워, 그도 격파했다.
그러나 이런 고순의 눈부신 활약도 헛되어 얼마 후 여포는 하비성 안으로 쫓겨 들어가 다음해 2월 최종적으로 조조에게 패배했다. 고순은 여포, 진궁(陳宮)과 함께 사로잡혔고4, 조조의 명령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수급은 허도(許都)의 시장에 효수당한 후 매장되었다.
인물상
고순의 인물됨은 청렴결백하고 위엄이 있으며, 과묵하여 일절 술을 마시지 않고, 어떤 선물이나 뇌물도 받지 않았다. 부하는 700명 정도였으나, 용감하기에 1,000명이라고 칭했고, 갑옷과 투구는 언제나 정련시켰다.
고순은 주군인 여포에 대한 충성심이 두터워, 자주 그에게 다음과 같이 간언하였다.
여포는 고순의 무용(武勇)과 충성심을 인정하고 있었으나, 고순을 싫어하여 학맹의 반란 사건 후에는 그 경향이 더 심해졌다. 여포는 위속(魏續)과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고순이 지휘하던 병사를 모두 빼앗아 위속에게 주었고, 전쟁이 일어나면 일부러 고순에게 위속 휘하의 병사를 지휘시켰으나 고순은 평생 원망을 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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