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훈제
계훈제(桂勳梯, 1921년 12월 31일 ~ 1999년 3월 14일)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며 민주화 운동가, 해방 이후 민족수호협의회 운영위원,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 등을 역임한 사회운동가이다. 평안북도 선천군 출신이다.
출생~사망 1921년 12월 31일 ~ 1999년 3월 14일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1:56
계훈제(桂勳梯, 1921년 12월 31일 ~ 1999년 3월 14일)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며 민주화 운동가, 해방 이후 민족수호협의회 운영위원,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 등을 역임한 사회운동가이다.1 평안북도 선천군 출신이다.
생애
1921년 평안북도 선천(宣川)에서 아버지 계봉집(桂鳳集)과 어머니 이형저(李亨姐)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43년 경성제국대학 1학년 재학 중 일제의 학병 징집을 거부하고 임시정부로 갈 계획으로 국경을 넘다 일본 헌병에 붙잡혀 지원병 훈련소로 압송됐다.평양 인근의 채석장에서 중노동을 하면서도 건국동맹과 연계했던 항일 독립운동 단체인 '조선민족해방협동단'에 가입해 항일 활동을 벌였다.
해방이후 장준하의 권유로 백범 김구 밑에서 일을 했다. 백범의 영향 아래 신탁통치 반대투쟁에 나섰고, 백범의 남북협상을 지지하며 삭발을 하기도 했다.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학생회장 때는 미군정에 의한 서울대학교의 국립화에 반대하는 ‘국대안 반대투쟁’을 이끌었다.
학생위원장이었던 시절 이희호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을 뻔 했지만, 훗날 계훈제가 폐결핵에 걸리고 이희호가 미국 유학길에 오르면서 인연이 엇갈렸다.2
5·16 쿠데타가 일어난 뒤 민주화운동의 가시밭길을 걷기 시작한다. 1963년 한일회담, 1968년 월남 파병, 1969년 3선개헌 등 박정희정권 시절 정치적 고비마다 반대투쟁에 앞장섰다. 교육자로 일하기도 하고 언론인으로서 사상계 편집장과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을 맡으면서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을 이끌었다.
1980년 '서울의 봄' 때는 계엄령 해제를 촉구했고,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휘말려 15개월 도피생활 후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제5공화국 시절 내내 민주화투쟁을 이끌었고, 1987년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의 상임공동대표를 맡아 1987년 을 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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