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2 사건
4•12 사건( - 事件, 영어: April 12 Incident)은 1927년 4월 12일 상하이에서 발생한 중국국민당의 중국공산당 초기 혁명 진영을 대상으로 한 무력을 동원한 진압과 공격을 가리킨다. 이 사건은 소련에 의해 진행된 제1차 국공 합작이 종료됨을 상징하였고 제1차 국공 내전이 이어지게 되었다.
시작~종료 1927년 4월 12일 ~ 1927년 4월 15일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후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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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북벌 기간 중 1927년, 장제스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 공격으로 중국공산당원의 공산혁명이 타격을 입었고 소련에 의한 제1차 국공 합작의 종결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 사건을 두고 진압에 찬성한 쪽에서는 ‘공산당원의 숙청, 정화(이른바 중국어 정체자: 淸黨, 병음: qīng dǎng 청당[*])’로 청당이라 불렀고, 반대파 쪽에서는 ‘공산 혁명의 기도를 막았다’는 뜻에서 ‘4•12 반혁명정변(중국어 간체자: 四一二反革命政變)’ 또는 **‘4•12 참안(중국어: 四一二慘案)’**으로 불렀다.
이 사건 이후 몇 달 동안 중화민국 전역에 중국공산당의 무장혁명에 대한 대대적인 경계와 숙청이 이뤄져 공산주의자, 좌파 당원들이 당에서 축출되었고 수배령이 내려져 많은 인사가 체포되고 투옥되고 처형당했으며 중국공산당원들이 탈당하거나 중국국민당으로 전향하였다. 중국국민당의 진압에 항의했던 사람들은 중국공산당으로 비밀리에 입당하거나 공산혁명을 지지하는 쪽에서 시위를 펼쳐 나아갔다. 이 사건으로 인해 천두슈(陳獨秀)와 더불어 대표적 공산주의자로 활동했던 리다자오(李大釗)가 베이징에서 처형당하는 등 코민테른에 의한 혁명운동의 세력이 몇 년간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배경과 원인
북벌을 단행하려고 소련과 연대했던 쑨원은 1923년부터 소련과 중국공산당원을 전략상 포용하는 방책을 마련하고 소련에 도움받아 모스크바와 광저우에 손일선대학(孫逸仙大學)과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를 세워 북벌을 위한 무관과 혁명 지도자를 육성하였으며 베이징을 포함한 북부 지방에 대해 북벌을 준비하였다. 1925년 쑨원의 사후, 중국국민당은 왕징웨이가 임시 당수에 오르고 장제스가 군권을 쥐는 체제로 조직이 짜여지는 중에 국공합작에 반대하는 기류가 당 내부로 흘러들었고 당내 갈등이 빚어졌다. 그것과 동시에 소련은 사후로, 과 가 중국에 친공 정권을 수립하려는 혁명 전략을 짜고 경쟁하였는데 중국공산당은 에 지시받아 국공합작을 발판으로 반제국주의와 반봉건주의에 기초한 토지 혁명과 혁명을 계속 이행하고자 하였고 중국국민당은 국가 건설을 맹렬히 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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