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 함락·선조 몽진
1592년 음력 4월 30일 선조가 한양을 떠나 개성·평양을 거쳐 6월 22일 의주까지 피난하고, 그 사이 일본군이 5월 2~3일 한양에 무혈 입성한 사건.
시작~종료 1592년 6월 9일 ~ 1592년 7월 30일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상세 타임라인
개요
탄금대 전투의 패보가 전해지자 선조는 1592년 음력 4월 30일(양력 6월 9일) 새벽 한양을 떠났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은 5월 2일, 가토 기요마사의 제2군은 5월 3일 한양에 들어왔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선조는 개성과 평양을 거쳐 6월 22일(양력 7월 30일) 압록강 가의 의주에 이르러 명에 원병을 청하였다. 왕이 도성을 버리고 피난한 이 일을 몽진(蒙塵)이라 한다.
배경
4월 17일 부산 함락 소식이 조정에 전해진 뒤 조정은 이일·신립을 내려보냈으나, 4월 29일 충주에서 신립마저 패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조정 안에서는 도성을 지키자는 의견과 피난하자는 의견이 엇갈렸으나 결국 서쪽으로 피난하기로 하였고, 광해군을 세자로 세웠다. 우의정 이양원을 유도대장으로 삼아 도성을 맡기고, 김명원을 도원수로 삼아 한강을 지키게 하였다.
피난 경로
- 4월 30일 새벽: 비가 오는 가운데 선조와 왕비, 세자, 대신들이 도성을 나섰다. 벽제관에서 쉬고 혜음령을 넘어 저녁에 임진강 나루에 이르렀다. 날이 어두워지자 나루 근처의 관청 건물을 불태워 강을 비추며 건넜다고 전한다. 밤에 동파역에 머물렀다.
- 5월 1일: 개성에 도착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개성까지 사흘이 걸렸다고 적는다.
- 5월 3일: 한양 함락 소식을 듣고 개성을 떠나 평산·봉산·황주를 거쳐 5월 7일 평양에 이르렀다.
- 6월 11일: 일본군이 대동강에 다가오자 평양을 떠나 숙천·안주·박천 등을 거쳐 서북쪽으로 향했다.
- 6월 22일: 의주에 도착하여 행재소를 차렸다. 선조는 요동으로 건너가는 내부(內附)까지 생각했으나 신하들이 반대하였다.
한양 함락
도성 방어를 맡은 이양원과 김명원은 일본군이 다가오자 싸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고니시 군은 충주에서 여주·양근을 거쳐 동대문으로, 가토 군은 죽산·용인을 거쳐 한강을 건너 남대문으로 들어왔다. 일본군이 들어오기 전 이미 궁궐과 관청 일부가 불타고 노비 문서가 있던 장례원 등이 습격당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서정일기』를 인용해 경복궁이 5월 7일 전소되었다고 서술하는데, 궁궐 방화의 주체와 시점은 『선조수정실록』의 백성 방화설과 일본 측 기록에 근거한 일본군 방화설 등으로 견해가 나뉜다.
결과와 영향
선조의 피난으로 조정은 명맥을 유지했지만, 백성을 버리고 떠났다는 원망이 컸다. 피난길 곳곳에서 백성들이 왕의 행렬에 돌을 던지거나 궁궐과 관아를 약탈하였다. 한편 세자 광해군은 분조(分朝)를 이끌고 평안도·황해도·강원도 등을 돌며 의병과 관군을 독려하였다. 의주의 조정은 명에 잇달아 사신을 보내 원병을 청했고, 그 결과 7월 조승훈, 12월 이여송의 명군이 압록강을 건넜다. 선조는 1593년 음력 10월 1일(양력 10월 24일) 한양으로 돌아왔다.
이설
한양 함락일은 고니시 군의 입성을 기준으로 5월 2일, 가토 군까지 들어온 날을 기준으로 5월 3일로 적는 경우가 있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5월 2일(양력 6월 11일)로 적는다.
참고 자료
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 r242 · 문서 내용은 CC BY-SA 4.0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