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르누뱅
피에르 르누뱅은 프랑스의 역사가이다. 국제관계사를 전문으로 연구하였다.
출생~사망 1893년 1월 9일 ~ 1974년 12월 8일마지막 수정 2026. 10. 16. 오후 4:27
피에르 르누뱅(Pierre Ronouvin, 1893년 1월 9일 – 1974년 12월 7일)은 프랑스의 역사가이다. 국제관계사를 전문으로 연구하였다.
약력
제1차 세계 대전과 수양 시대
피에르 르누뱅은 1893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리세 루이르그랑에서 공부한 뒤 법학사 학위 취득을 목표로 했으나, 역사학 연구로 방향을 바꾸어 1912년 역사학과 지리학에서 아그레가시옹에 합격한다. 고등교육과정 수료증(diplôme d'études supérieures) 취득 당시의 지도교수는 프랑스 혁명사의 권위자 알퐁스 올라르이다.
제1차 세계 대전에의 참전은 르누뱅의 인생에 파괴를 가져왔다. 니벨 공세 당시 샹 데 담 전투에서 한쪽 팔을 잃은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거친 뒤, 그는 리세 오를레앙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도의회(assemblées provinciales)에 관한 박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연구 계획은 당시 교육부 장관 앙드레 오노라가 르누뱅에게 대전의 기원에 관한 대규모 조사를 요청하면서 변경되었다.
정부의 연구 요청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것이 아니었다. 배상 문제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오갔으며, 독일은 개전의 단독 책임을 부정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정부는 르누뱅에게 연구 자금을 지원하여 독일의 전쟁 책임을 입증하게 하려 했으나, 그의 연구 결론은 정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었다.
연구 활동
이렇게 르누뱅은 제1차 세계 대전 연구를 전문으로 삼았다. 대전 중 산업자본가 앙리 르블랑과 루이즈 샤를리에 두 사람은 여러 나라에 관한 소책자, 도판, 문서를 수집하고 있었다. 이 자료를 바탕으로 탄생한 것이 뱅센의 현대국제문서관(bibliothèque de documentation internationale contemporaine)이다. 르누뱅은 1920년대에 본관의 사서로 임명되었다.
그는 소르본 대학교에서 국제관계사 강좌 교수를 지냈으며, 1946년에는 프랑스 학사원 도덕·정치학 아카데미(Académie des sciences morales et politiques) 회원, 1959~71년에는 국립정치학재단(Fondation Nationale des Sciences Politiques) 회장을 역임하였다. 르누뱅의 인품과 저작은 특히 장바티스트 뒤로젤과 니콜라 오펜스타트 등 여러 세대의 역사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그 영향은 프랑스 역사가에 그치지 않았다. 르누뱅의 저명한 제자 중 한 사람이 그리스의 역사가 디미트리 치치스이다.
국제관계사 연구에 대한 기여
이 시기에 르누뱅은 외교 사료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외교 행위만이 아니라 그 바탕에 있는 여러 힘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르누뱅은 그 후 국제적인 대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연구를 이어 나갔고, 전통적 외교사와는 다른 국제관계사를 추구하여 그 구현자가 되었다. 의 영향을 받은 르누뱅은 사건 분석에서 "심층의 힘(forces profondes)"을 중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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