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티용 전투(프랑스어: Bataille de Castillon, 영어: Battle of Castillon)는 백년 전쟁 중인 1453년 7월 17일에 프랑스 왕국·브르타뉴 공국과 잉글랜드 왕국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경과
보르도를 둘러싼 쟁탈
1450년 4월 15일의 포르미니 전투에서 승리한 프랑스군은 기세를 몰아 8월에 북쪽의 노르망디를 완전히 점령하였고, 남은 잉글랜드령은 남서부의 기옌(현재의 아키텐=리무쟁=푸아투=샤랑트 지역권) 뿐이었다.
프랑스군은 9월에 기옌으로 남하하여 베르주라크를 빼앗았고, 이듬해인 1451년 5월에는 뒤누아 백작 장 드 뒤누아와 장 뷔로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기옌의 중심 도시 보르도를 포위하였다. 교섭 끝에 6월에 점령하고, 8월 20일에는 남쪽의 바이온까지 점거하여 백년 전쟁도 끝을 맞이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잉글랜드 왕가의 지배를 300년 동안 받아 온 보르도의 시민들은 스스로를 잉글랜드인이라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에게 이 지방을 다시 되찾아 달라고 요청하는 사절을 보냈다.
1452년 10월 17일, 슈루즈베리 백 존 탤벗은 보르도 부근에 3000명의 무장병 및 궁수와 함께 상륙하였다. 프랑스의 수비대는 보르도 시민들에 의해 쫓겨났고, 시민들은 크게 기뻐하며 잉글랜드인들을 위해 성문을 열었다. 아키텐 남부의 가스코뉴 지방에서도 많은 도시들이 보르도의 예를 따라 잉글랜드인들을 받아들였다. 노르망디와 브르타뉴에도 잉글랜드 함대가 다가왔으며, 노르망디를 점령 통치하고 있던 아르튀르 드 리슈몽 대원수와 그의 조카인 브르타뉴 공 피에르 2세가 이를 맞아 싸워 상륙을 막았다. 그러나 이것들은 양동 작전이었으며, 그 사이 보르도의 잉글랜드군은 증원을 받아 전력이 강화되었다.
겨울 동안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는 병력을 모아 작전 행동을 취할 계절에 대비하였다. 1453년 봄이 오자, 샤를 7세는 보르도를 향해 세 개의 군대를 각기 다른 경로로 출발시켰다. 로에아크 원수, 즉 앙드레 드 라발과 장 뷔로가 이끄는 한 부대는 보르도 주변 지역을 함락시키는 작전에 나서, 보르도에서 동쪽으로 약 50km 떨어진 카스티용을 포위하였다.
슈루즈베리 백작은 이 새로운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본국으로부터 새로이 3000명의 병력을 받아들였으나, 그 수는 가스코뉴의 경계까지 수천 명에 이르는 프랑스군을 밀어내기에는 전혀 부족한 것이었다. 프랑스군이 카스티용을 포위 아래 두자, 슈루즈베리는 도시 수비대장의 요구를 받아들였던 당초의 작전(야전에서 국경까지 밀어냄)을 버리고, 이 도시를 해방시키는 일에 착수하였다.
라발과 뷔로 등은 슈루즈베리를 두려워하여, 자신의 휘하 7000명에서 10000명의 병사들에게 진지를 참호와 목책으로 둘러싸도록 명령하고, 300문의 대포를 목책의 틈 사이에 배치하였다. 수적으로 우세함을 누리고 있어야 할 프랑스 측으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방어적인 편성이었다. 그들은 카스티용을 에워싸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고 있었다1.
양군 충돌
슈루즈베리는 1453년 7월 17일 프랑스 측의 진지에 접근하였는데, 그것은 1300명의 기병으로 이루어진 전위 부대를 거느린 그의 군대의 주력이 도착하기 전이었다. 그는 프랑스군 야영지 앞의 숲에서 같은 규모의 프랑스 측 자유사수(francs archers(프랑 아르셰), 활 훈련을 하는 대신 조세를 면제(franc)받은 자유민, 민병)로 이루어진 부대를 격파하여, 자군의 사기를 크게 높여 놓은 상태였다.
최초의 소규모 접전으로부터 몇 시간 뒤, 카스티용 시에서 온 전령이 슈루즈베리의 휴식 중인 군대(그들은 밤을 새워 행군해 온 상태였다)에게, 프랑스군이 총퇴각하였으며 수백 기의 기병이 요새를 버리고 도망쳤다고 보고하였다. 도시 성벽 근처에서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라 멀어져 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도망친 것은 다가올 전투 전에 진지를 떠나도록 명령받은 비전투 종군자(상인·세탁부·창녀)뿐이었다.
슈루즈베리는 즉시 휘하 병사들을 재편성하여 프랑스군의 진지를 향해 진격하였으나, 완전무장한 수천의 궁수와 수백 문의 포문으로 방어된 보루를 눈앞에서 보게 되었다. 놀랐지만 슈루즈베리는 물러서지 않고 프랑스군에 대해 돌격 신호를 내렸다. 슈루즈베리는 이 전투에 직접 참가할 수는 없었는데, 그는 직전의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있었고, 포로 선서(석방 후에도 일정 기간 전선에 서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풀려나는 것)를 한 뒤 가석방된 상태였으므로, 무기를 들고 프랑스인과 싸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군대는 프랑스의 진지를 향해 돌격했으나, 참호를 넘자마자 비 오듯 쏟아지는 화살과 쇠뇌의 살(석궁의 화살), 맹렬한 박격포와 대포, 소화기의 공격을 받았다. 집중 사격이 가능했던 이유는 참호 덕분이었는데, 우연히 옛 소하천의 하상을 이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관상 능보를 갖춘 방어진처럼 보였다.
일단 전투가 시작되자 슈루즈베리는 주요 종자들로 이루어진 몇몇 병사들의 증원을 받았으나, 1시간 뒤 브르타뉴 공 피에르 2세가 파견한 브르타뉴군의 기병이 도착하여 잉글랜드군의 우측면을 찔렀다. 잉글랜드군은 패주하였고 곧바로 프랑스군 주력에 의해 추격당했으며, 슈루즈베리는 아들 릴 자작 존 탤벗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 대혼란 속에서 슈루즈베리의 말은 대포의 포탄에 맞아 죽었고, 그는 그 말에 깔린 상태가 되었다. 한 자유사수가 그가 슈루즈베리임을 알아차리고, 도끼로 그를 죽일 때까지 그 상태였다2.
전후
프랑스군은 기세를 타고 10월 5일 보르도를 함락시켰다. 그로부터 2주일 뒤인 10월 19일 샤를 7세가 입성함으로써 기옌 평정을 이루었고, 백년 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다3.
한편 잉글랜드에서는 패전 후 헨리 6세가 정신착란을 일으켰고, 이를 계기로 측근인 서머싯 공 에드먼드 보퍼트와 왕족인 요크 공 리처드 플랜태저넷이 정쟁을 벌였다. 주변까지 끌어들인 정쟁은 2년 뒤인 1455년 장미 전쟁으로 발전하였고, 잉글랜드는 30년에 걸친 내전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참고 문헌
- 장폴 에튀베리 저, 오타니 조준 역, 『백년 전쟁과 리슈몽 대원수』 가와데쇼보신샤, 1991년.
- 버트 S. 홀 저, 이치바 야스오 역, 『화기의 탄생과 유럽의 전쟁』 헤이본샤, 1999년.
- 히구치 아쓰시, 『프랑스를 만든 왕 ~샤를 7세 연대기~』 유쇼칸, 2011년.
- 사토 겐이치, 『발루아 왕조 프랑스 왕조사 2』 고단샤(고단샤 현대신서), 2014년.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