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벨 후드(영: John Bell Hood, 1831년 6월 1일1 또는 6월 29일2 – 1879년 8월 30일)는 남북전쟁 당시의 남군 장군이다. 후드는 용맹함과 공격성으로 명성을 얻었으나, 그것은 때로 무모함과 종이 한 장 차이였다. 남군에서 가장 뛰어난 여단 및 사단 지휘관 중 한 명으로 꼽히지만, 전쟁 후반에 더 큰 독립 군 지휘관으로 승진하면서 그의 능력은 점차 효력을 잃었고, 애틀랜타 방면 작전과 프랭클린–내슈빌 방면 작전에서 군을 이끌고 결정적인 패배를 당함으로써 그의 군 경력은 손상되었다.
생애
초기 경력
후드는 켄터키주 오잉스빌에서 의사 존 W. 후드와 시어도시아 프렌치 후드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훗날 남군 장군이 된 거스터버스 우드슨 스미스와는 사촌 간이었으며, 미국 하원 의원 리처드 프렌치의 조카였다. 프렌치 하원의원이 얻어준 육군사관학교 입학 추천으로 입학했으나, 후드의 아버지는 아들이 군인으로서 경력을 쌓는 것을 망설였다. 후드는 1853년 동기 52명 중 44번째 성적으로 졸업했으나, 마지막 학년의 저조한 성적 때문에 퇴학 위기에 놓였었고, 처음에는 96번째로 되어 있었다. 웨스트포인트에서의 비참한 기록에도 불구하고, 1860년에는 웨스트포인트의 기병 주임 교관으로 임명되었으나, 활동적인 야전 연대에 남고 싶다는 이유와 다가오는 전쟁에서 선택지를 남겨 두고 싶다는 이유로 그 직을 사임했다3. 웨스트포인트와 그 후의 군 생활에서 친구들은 그를 "샘"이라고 불렀다4. 동기생으로는 제임스 맥퍼슨, 존 M. 스코필드가 있었다. 조지 헨리 토머스에게서는 포병 지도를 받았다. 이 세 사람은 모두 북군 장군이 되어 전장에서 후드와 맞서 싸웠다.
후드는 제4 미국 보병연대의 소위로 임관하여 캘리포니아주에서 복무했고, 이후 텍사스주의 제2 미국 기병연대로 전속되어 앨버트 존스턴 대령과 로버트 E. 리 중령 휘하에 배속되었다. 후드는 메이슨 요새에서 정찰대를 이끌고 출정했을 때, 그의 군 경력 중 입은 많은 부상 가운데 하나를 입었다. 텍사스주 데빌스 강에서 코만치족과 전투 중 화살이 왼손을 관통했다.
남북전쟁
여단 및 사단 지휘관
후드는 섬터 요새 전투 직후 미국 육군을 전역했다. 생지인 켄터키주가 중립을 택한 데 불만을 품고, 임지인 텍사스주를 위해 일하기로 결심했다. 기병 대위로서 남군에 합류했고, 1861년 9월 30일까지 제4 텍사스 보병연대를 지휘하는 대령으로 승진했다.
1862년 2월 20일, 후드는 이후 후드의 텍사스 여단이라고 불리게 되는 여단의 지휘관이 되었다. 이 부대는 남군 포토맥군의 일부가 되었으며, 3월 3일에는 준장으로 승진했다. 반도 방면 작전에서는 북버지니아군의 부대로서 텍사스 여단을 이끌었고, 전선에서 직접 부대를 열심히 지휘하며 공격적인 지휘관으로서의 명성을 쌓았다. 6월 27일 게인스밀 전투에서는 1개 여단의 돌격을 이끌어 북군의 전선을 돌파하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며, 7일 전투에서도 남군 측에서 가장 성공적인 활약이 되었다. 이 전투에서 후드는 부상 없이 전장을 빠져나왔으나, 여단의 다른 장교들은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반도에서의 그 성공 덕분에, 북버지니아군에서 제임스 롱스트리트 소장의 제1군단 소속으로 1개 사단을 맡게 되었다. 북버지니아 방면 작전에서 그는 그 사단을 이끌었고, 북군을 거의 붕괴 직전까지 몰아붙인 2차 불런 전투에서 롱스트리트가 존 포프 군의 좌익에 대규모 공격을 가했을 때, 충격적인 부대의 주요 지도자가 되어 명성을 이어 나갔다. 북군을 추격하던 중에는 노획한 구급차를 두고 상관과 논쟁에 휘말렸다. 롱스트리트는 이 논쟁 건으로 후드를 체포하고 군에서 떠나라고 명령했으나, 리 장군이 개입하여 후드를 남게 했다. 메릴랜드 방면 작전 때는 사우스 산 전투 직전까지도 후드는 사실상 구금된 상태로 후위에 있었다. 그때 그의 텍사스 기병들이 말을 타고 지나가던 리 장군을 향해 "후드를 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쳤다. 후드는 그 행동에 대해 사과하기를 거부했지만, 리는 후드를 지휘에 복귀시켰다. 그러나 이 두 장군은 결국 사이가 좋아졌다.
앤티텀 전투에서는 후드의 사단이 남군의 좌익에 있던 스톤월 잭슨의 군단을 구원하러 갔다. 잭슨은 후드의 활약에 감탄하여 그를 소장으로 승진 추천했고, 그것은 1862년 10월 10일자로 실현되었다.
12월의 프레더릭스버그 전투에서는 후드의 사단이 전투에 거의 참가하지 않았다. 1863년 봄 챈설러스빌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을 때, 롱스트리트의 제1군단이 버지니아주 서폭의 분견대로 파견되어 있었기 때문에 현장에 없었다.
게티즈버그
게티즈버그 전투 때, 롱스트리트 군단은 1863년 7월 1일 1일차 전투 늦게 전장에 도착했다. 리 장군은 2일차 전투에서 롱스트리트 군단이 북동쪽 에미츠버그 도로를 따라 올라가 북군의 좌익을 공격하는 작전을 세웠다. 후드는 자기 부대가 데빌스 덴이라고 불리는 바위가 많은 험한 지형을 맡게 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롱스트리트에게 북군의 좌익을 우회하여 빅 라운드톱이라 불리는 산을 넘어 북군의 후방을 치겠다고 허락을 구했다. 롱스트리트는 그 허락을 거부했고, 후드가 거듭 항의했음에도 불구하고 리의 명령을 고수했다. 후드는 타협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여 7월 2일 오후 4시경 출발했으나, 여러 요소가 겹쳐 의도했던 방향에서 동쪽으로 벗어나 결과적으로 리틀 라운드톱에서 북군과 맞닥뜨렸다. 그러나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후드의 머리 위에서 포탄이 터졌고, 왼팔이 중상을 입어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팔은 절단되지 않았으나, 후드의 남은 생애 동안 전혀 쓸 수 없게 되었다). 후드의 다음 여단 지휘관이었던 이븐더 로 준장이 사단의 지휘를 이어받았으나, 지휘 계통의 혼란이 남군의 공격력과 방향을 약화시켜 전투 전체의 향방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후드는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서 요양했으며, 남군의 부인들에게 사교적인 인상을 남겼다. 1863년 8월, 유명한 일기 작가 메리 체스넛은 후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후드가 슬픈 돈키호테의 얼굴, 자신을 믿고 그 십자가와 왕관을 믿은 옛 기사의 얼굴을 하고 나타났을 때, 우리는 거친 텍사스인들 사이에서 그처럼 이상에 가까운 남자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키가 크고 날씬하며 수줍음을 탄다. 눈은 파랗고 머리카락은 밝다. 황갈색 턱수염은 풍성하여 얼굴 아랫부분을 덮고 있으며, 전체적인 인상은 서툰 강자의 그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가 보여 주는 대단히 점잖은 태도는 숙녀들의 사교계에서만 보인다고 말했다. (찰스 S.) 베너블 소령은 남자의 눈에서 빛나는 전투의 빛에 대해 자주 들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한 번 그것을 보았다. 리의 명령을 후드에게 전했을 때, 가장 치열한 전투 한가운데에서 남자가 변하는 것을 보았다. 후드 눈의 격렬한 빛을 나는 잊지 못한다.
치카마우가
한편, 서부 전선에서는 브랙스턴 브래그 장군이 지휘하는 남군이 고전하고 있었다. 리는 롱스트리트의 군단을 테네시주에 파견했고, 후드는 9월 18일 롱스트리트 군에 합류할 수 있었다. 치카마우가 전투에서 후드의 사단은 브라더턴 캐빈에서 북군의 전선을 돌파하여 윌리엄 로즈크랜스 장군의 북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후드는 다시 중상을 입었고, 오른쪽 다리는 엉덩이 아래 4인치(10cm)를 남기고 절단되었다. 후드의 상태는 위중했으며, 군의관들은 후드와 함께 절단된 다리를 구급차에 실었고, 둘 다 함께 무덤에 묻힐 것이라고 예측했다. 치카마우가에서 보여 준 후드의 용맹함 때문에, 롱스트리트는 1863년 9월 20일자로 그를 중장으로 승진 추천했다.
그해 가을, 리치먼드에서의 두 번째 요양 기간 중, 후드는 아메리카 연합국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와 친분을 깊게 했고, 그 결과 데이비스는 후드를 더 중요한 역할로 승진시키기로 결정했다.
테네시군 사령관
1864년 봄, 조지프 존스턴 장군 휘하의 테네시군은 테네시주 채터누가에서 조지아주 애틀랜타로 진격하는 북군 윌리엄 셔먼에 맞서는 작전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 작전 동안 후드는 리치먼드의 정부에 편지를 보내 존스턴의 행동을 강하게 비판했다(후드의 위치에 있는 자에게 극히 부적절하다고 여겨지는 행동). 1864년 7월 17일, 피치트리 크리크 전투 직전에 제퍼슨 데이비스는 존스턴의 후퇴를 계속하는 전략에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어 그를 해임했다. 존스턴 군단의 지휘관이었던 후드는 7월 18일 임시 대장으로 승진하여, 애틀랜타 입구 바로 밖에 있던 테네시군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후드는 당시 33세였으며, 남북전쟁 양측을 통틀어 1개 군의 지휘를 맡은 자 중 가장 어렸다. 로버트 E. 리는 이 선택에 반대하여 데이비스에게 조언했으며, 후드는 "모두가 사자이고 여우는 아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여겨진다(후드의 임시 대장 승진은 아메리카 연합국 상원에서 확인되지 않았다. 중장으로서의 임무는 1865년 1월 23일에 재개되었다5).
후드는 애틀랜타 방면 작전의 나머지 기간 동안, 그를 유명하게 만든 강한 공격적 행동으로 일관했다. 그해 여여름 셔먼의 애틀랜타 포위를 깨기 위해 취임 직후 피치트리 크리크를 필두로 4번의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그 공격은 모두 실패했고, 남군은 큰 손실을 입었다. 결국 1864년 9월 2일, 후드는 애틀랜타를 명도하기로 하고, 가능한 한 많은 군사 물자와 시설을 불태웠다.
셔먼이 애틀랜타에서 군을 재편성하고 그 바다로의 진군 준비를 하는 동안, 후드와 제퍼슨 데이비스는 셔먼을 무너뜨릴 전략을 고안하려 했다. 그 작전은 셔먼의 채터누가로부터의 통신선을 공격하고, 이어서 앨라배마주를 거쳐 북상하여 테네시주 중부로 들어가면, 셔먼이 위협을 느끼고 추격해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후드의 기대는 셔먼에게 결전을 강요하여 그를 격파하고, 테네시주와 켄터키주에서 새로이 병사를 모집하여 컴벌랜드 계곡을 통과해 피터즈버그에서 포위당한 로버트 E. 리를 구원하러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셔먼은 말려들지 않았다. 대신 조지 헨리 토머스 소장을 테네시주의 북군을 통괄하도록 파견하여, 후드 군에 대한 방어를 조정하게 했고, 셔먼 군의 대부분은 사바나로 향하는 행군 준비를 진행했다.
후드의 테네시 방면 작전(프랭클린–내슈빌 방면 작전)은 1864년 9월부터 12월까지 이어졌으며, 그 사이 7차례의 전투를 치르고 수백 마일을 진군했다. 11월 29일 스프링힐 전투에서 존 스코필드 소장의 오하이오군 대부분을 격파하는 데 실패한 뒤, 다음 날 프랭클린 전투에서는 북군의 흉벽을 파괴하려던 시도도 실패하여, 북군이 내슈빌을 향해 방해받지 않고 철수하는 것을 허용했다. 2주 후, 북군의 조지 토머스 장군이 내슈빌 전투에서 다시 후드 군을 격파하여, 후드 군의 대부분이 소멸되었다. 이는 남북전쟁 동안 남군에게 최대급의 손실이었다. 내슈빌의 참극 이후, 테네시군의 잔여 병력은 미시시피주로 철수했고, 후드는 1865년 1월 23일자로 대장으로서의 임무를 반납하고 중장으로 되돌아갔다.
전쟁이 끝나 갈 무렵, 제퍼슨 데이비스는 후드에게 텍사스주로 가서 새로운 군대를 일으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텍사스에 도착하기 전에 에드먼드 커비 스미스 장군과 그의 텍사스군이 북군에 항복했고, 후드 자신도 미시시피주 내치즈에서 항복했다. 후드는 1865년 5월 31일 가석방되었다.
전후 경력
전후 후드는 루이지애나주로 이주하여 면화 중개인이 되었으며, 생명보험 회사인 라이프 어소시에이션 오브 아메리카의 사장을 지냈다. 1868년 뉴올리언스 출신의 앤나 마리 헤넨과 결혼했으며, 이후 10년 동안 3쌍의 쌍둥이를 포함해 11명의 자녀를 둔 아버지가 되었다. 여러 자선 사업을 통해 지역 사회에도 기여했으며, 전쟁의 참화 속에 남겨진 고아, 과부 및 상이군인을 위한 기금을 세우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의 생명보험 사업은 1878년부터 1879년 겨울 뉴올리언스에서 유행한 황열병으로 파산했다. 후드 자신도 황열병에 감염되어, 아내와 맏이의 죽음 몇 일 뒤에 사망했다. 이후 10명의 빈곤한 고아가 남겨졌으며, 이들은 루이지애나주, 미시시피주, 조지아주, 켄터키주 및 뉴욕주의 가정에 입양되었다.
기념
존 벨 후드는 뉴올리언스의 메테리 공동묘지에 있는 헤넨 가문의 묘에 안장되어 있다. 텍사스주 후드 카운티 및 같은 텍사스주에 있는 미국 육군 기지 후드 요새에 그의 이름이 남아 있다.
스티븐 빈센트 베네의 시 『북버지니아군』에는 후드에 관한 신랄한 구절이 있다.
Yellow-haired Hood with his wounds and his empty sleeve,(황금빛 머리의 후드, 상처투성이에 소매는 비어 있다)
Leading his Texans, a Viking shape of a man,(텍사스 부대를 이끄는 바이킹 같은 사내)
With the thrust and lack of craft of a berserk sword,(광포한 검의 찌르기는 있으나 기교는 없다)
All lion, none of the fox.(모두 사자이고, 여우는 없다)
When he supersedes Joe Johnston, he is lost, and his army with him,(조 존스턴과 교체되자 그는 길을 잃었고, 그의 군대도 함께 그러했다)
But he could lead forlorn hopes with the ghost of Ney.(그러나 그는 네의 유령과 함께 절망적인 희망을 이끌 수 있었다)
His bigboned Texans follow him into the mist.(뼈대가 굵은 텍사스 부대가 안개 속으로 그를 따른다)
Who follows them?(그들을 따르는 자는 누구인가?)
프랭클린–내슈빌 방면 작전에서의 패배 후, 후드의 병사들은 『텍사스의 노란 장미』의 개사곡으로 후드에 대해 풍자와 해학이 섞인 노래를 불렀다.
My feet are torn and bloody,(발은 찢어지고 피투성이다)
My heart is full of woe,(마음은 슬픔으로 가득하다)
I'm going back to Georgia(조지아로 돌아가리라)
To find my uncle Joe.(우리 조 아저씨를 찾으러)
You may talk about your Beauregard,(보리가드에 대해 이야기해도 좋다)
You may sing of Bobby Lee,(바비 리에 대해 노래해도 좋다)
But the gallant Hood of Texas(하지만 텍사스의 용감한 후드는)
He played hell in Tennessee.(테네시에서 지옥을 연출했다)
대중문화 속에서
- 영화 『신과 장군』 및 『게티즈버그』에서 후드는 배우 패트릭 고먼이 연기했으며, 당시 후드는 32세였을 것이지만 상당히 늙어 보인다.
- 뮤지션 겸 배우 리번 헬름이 2008년 영화 『일렉트릭 미스트 안개 속의 수사선』에서 후드를 연기했다.
- 1988년 로버트 스키민의 또 다른 역사 소설 『회색의 승리』의 기본 전제에서는, 후드가 애틀랜타 방어를 중단하고 북군에 대해 절망적인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한 것이 남부가 전쟁에서 승리할 마지막 기회를 잃게 했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스키민의 견해로는, "움직임이 둔한" 조지프 존스턴이 지휘관으로 남아 있었다면, 병사들은 방어진지 안에 머물며, 북부에서의 1864년 11월 대통령 선거까지 길게 끄는 포위 소모전을 치렀을 것이며, 전쟁에 지친 북부 유권자들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대신 조지 매클렐런을 선택하여, 남부의 승인으로 전쟁을 끝냈을 것이라고 한다.
참고 문헌
- Chesnut, Mary, Diary of Mary Chesnut, D. Appleton and Company, 1905.
- Eicher, John H., and Eicher, David J., Civil War High Commands,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1, ISBN 0-8047-3641-3.
- McMurry, Richard M., John Bell Hood and the War for Southern Independence,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1992, ISBN 0-8032-8191-9.
- Sword, Wiley, The Confederacy's Last Hurrah: Spring Hill, Franklin, and Nashville, William Morrow & Co., 1974, ISBN 0-688-00271-4.
- Tagg, Larry, The Generals of Gettysburg, Savas Publishing, 1998, ISBN 1-882810-30-9.
- Warner, Ezra J., Generals in Gray: Lives of the Confederate Commanders, Louisiana State University Press, 1959, ISBN 0-8071-0823-5.
- Hood's biography in About North Georgia
- Hood's biography in Handbook of Texas Online
- JohnBellHood.org website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