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량
이성량(李成梁, 1526년 ~ 1615년)은 자는 여계(汝契)로, 요동(遼東) 총병관(總兵官)으로 요동 일대를 통괄하고 여진족을 다스린 명나라 후기의 무관이다. 조상이 고려인이다.
출생~사망 1526년 ~ 1615년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후 2:13
문서 정보
- 출생 ~ 사망
- 1526년 ~ 1615년
- 로마자 표기
- Lee Seong-ryang
- 출생
- 1526년
- 사망
- 1615년
- 성별
- 남성
- 경력
- 요동 총병관
- 직업
- 무관
- 위치
- 42.2841, 123.8365
이성량(李成梁, 1526년 ~ 1615년)은 자는 여계(汝契)로, 요동(遼東) 총병관(總兵官)1으로 요동 일대를 통괄하고 여진족을 다스린 명나라 후기의 무관이다. 조상이 고려인이다.
생애
기록에 의하면, 이성량의 본관은 성주(星州)이며, 직계 조상은 경상도 성주 출신으로 고려의 원종(元宗)때의 관료이자 학자였던 이조년(李兆年, 1269 ~ 1343)의 친형이자 고려 전객부령 이천년(李千年)의 6대손이라고 전한다. 이천년의 아들이자 이성량의 5대조 이승경(李承慶, 1290 ~ 1360)은 원나라에서 요양성참정(遼陽省參政) 등의 벼슬을 지냈고 고려에서는 문하시랑 평장사에 이르렀다. 이승경의 아들 이영(李英)은 고려인으로 중국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고려인끼리 세습 결혼하였고, 이영의 4대손이 바로 이성량이다.
이성량은 요동 철령위(鐵嶺衛, 오늘날 랴오닝성 톄링)의 지휘첨사(指揮僉事) 관직을 대대로 세습하고 있었지만, 융경 4년(1570년)에 요동총병관(遼東總兵官)이 되어, 당시 침입이 격렬했던 여진족 방어를 담당하였다. 이성량은 요동의 인삼과 모피 교역을 장악하여 부를 축적하는 한편, 사적으로 모병한 군대와 함께 투항한 여진인, 조선인, 몽골인 가운데 선발한 정예병을 선발, 명 조정의 지시 없이 직속으로 거느리는 일종의 사병 부대를 조직하였다.2 건주여진(建州女眞)과 해서여진(海西女眞) 등에 나뉘어 있던 여진족이 명과의 교역권을 둘러싸고 싸우고 있는 것에 개입해 내부 분열을 도모하였다. 이로 인해 이성량은 요동의 안정에 큰 공적을 올렸다. 이 시기 이성량의 후원을 얻어 세력 확대에 성공한 것이 후의 청태조(淸太祖) 누르하치(Nurhaci, 努爾哈赤)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요동을 통괄해 지방의 실력자로서 할거한 이성량은, 한편으로 군비의 유용 등 독직이나 전단이 많아, 만력 19년(1591년)에 탄핵되어 실직되었다. 잠시 복직했지만 만력(萬曆) 36년(1608년)에 파면되었다.
누르하치와의 관계
만력 11년(1583) 음2월, 이성량은 왕고(王杲)의 아들 아타이(Atai, 阿台)를 공격하였다. 왕고의 손녀 사위이자 누르하치의 할아버지 (Giocangga, 覺昌安)와 아버지 (Taksi, 塔克世)는 이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기오창가와 탁시는 왕고의 일계였지만 이땐 이미 이성량에게 귀부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이성량과 (Nikan Wailan, 尼堪外蘭)이 고의로 기오창가 부자를 죽게 하였다. 일부에서는 오인 사살되었다고 전한다. 어쨌든 이에 대해 누르하치는 매우 한탄해 하며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무슨 이유로 해를 입었는가? 너희는 곧 우리의 불구대천지원수이다! 너는 더 할 말이 있는가?(我祖·父何故被害? 汝等乃我不共戴天之讐也, 汝何辭)"라고 하였다. 이성량은 일이 틀어진 것을 알고 탁시의 땅과 사람, 말을 누르하치에게 보냈고 그에게 도독(都督) 지휘직함을 주어 보상하였다. 후에 누르하치는 여진 부락을 통일하고 (後金)을 세운 후에,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는 것을 명분으로 명(明)을 배신한다는 '칠대한(七大恨)'의 하나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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