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보
이산보(李山甫, 1539년 ~ 1594년)는 조선의 문신이다. 이지함은 그의 삼촌이 된다. 영의정을 지낸 아계 이산해는 이산보의 사촌이다. 삼촌 이지함의 문인. 자(字)는 중거(仲擧), 별칭은 장덕 군자(長德君子)이고, 호는 명곡(鳴谷), 명곡선생(鳴谷先生)이다. 임진왜란 초반 무군사 당상(撫軍司堂上)으로서 검찰사(檢察使)가 된 지 1년여에 군량을 운송하는 데 공을 세웠고, 명을 받아 기민을 진휼하다가 과로로 순직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에 추록되었고,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원종공신 1등(衛聖原從功臣)에 추록되
출생~사망 1539년 ~ 1594년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후 2:13
문서 정보
- 출생 ~ 사망
- 1539년 ~ 1594년
- 본명
- 이산보
- 출생
- 1539년
- 사망
- 1594년
- 성별
- 남성
- 국적
- 조선
- 경력
- 무군사 당상, 검찰사
- 직업
- 문신
- 상훈
- 호성공신, 위성원종공신 1등
이산보(李山甫, 1539년 ~ 1594년)는 조선의 문신이다. 이지함은 그의 삼촌이 된다. 영의정을 지낸 아계 이산해는 이산보의 사촌이다. 삼촌 이지함의 문인. 자(字)는 중거(仲擧), 별칭은 장덕 군자(長德君子)이고, 호는 명곡(鳴谷), 명곡선생(鳴谷先生)이다. 임진왜란 초반 무군사 당상(撫軍司堂上)으로서 검찰사(檢察使)가 된 지 1년여에 군량을 운송하는 데 공을 세웠고, 명을 받아 기민을 진휼하다가 과로로 순직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에 추록되었고,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원종공신 1등(衛聖原從功臣)에 추록되었다.
이력
1568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해미현감과 사간원 정언, 성균관전적 등을 지내고 북도 순안어사로 파견되었다. 그 뒤 홍문관의 직책을 지내다가 동인의 공격을 받고 종부시정으로 좌천되었다가 동부승지와 대사간 등을 지냈다.1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거(仲擧), 호는 명곡(鳴谷).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지무(之茂)이다. 어머니는 김제군수 구승유(능성구씨 낭장공파)의 딸이다. 숙부인 지함(之菡)에게 배웠다. 1568년(선조 1)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전적·해미현감·정언 등을 지냈다. 순안어사(巡按御史)로 북도를 순찰하고 돌아온 뒤 수찬·지평·사인·응교·직제학 등을 역임했다. 동인의 탄핵을 받아 종부시정(宗簿寺正)으로 좌천되었다가 동부승지·대사간을 거쳐 1585년 이이(李珥)·정철(鄭澈)을 논박한 부제학 김우옹(金宇顒)을 반박한 일로 선조의 신임을 얻어 대사헌이 되었다. 그러나 이이·정철·박순(朴淳) 등의 공을 논하다가 경상도관찰사·황해도관찰사로 전직되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을 계기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대사간으로서 사건을 다스렸고, 이듬해에는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91년 왕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동인과 서인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정철 등 서인이 화를 입자 황해도관찰사로 있다가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扈從)한 뒤 이조참판·이조판서를 지냈고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북도와 삼남의 도검찰사(都檢察使)로 나갔다. 좌참찬을 지내고 1594년 대기근을 수습하려고 애쓰다 죽었다.
1604년 호종공신 2등에 서훈되고 한흥부원군(韓興府院君)에 추봉되었고, 관직은 영의정에 증직됐다.1 시호는 충간(忠簡).
충청남도 保寧시 청라면 출신이며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 고만산에 묘역이 있다. 1539(중종 34)∼1594(선조 2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거(仲擧), 호는 명곡(鳴谷). 증 영의정 색(穡)의 7대손이며, 지무(之茂)의 아들이다. 작은아버지인 지함(之菡)을 사사하였다. 1567년(명종 22)사마시를 거쳐 1568년(선조 1)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의 추천으로 춘추관에 들어갔다가 전적•해미현감•정언 등을 지냈으며, 왕명을 받고 순안어사(巡按御史)로 북도(北道)를 순찰하고 돌아와 수찬•교리•지평•헌납•이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1577년 양모의 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직하고 서천에 돌아갔다가 다시 사인•집의•사간•응교•직제학 등을 지냈으며, 당론을 끝까지 진술하다가 동인들의 탄핵을 받고 종부시정에 좌천되었다. 1년 뒤 다시 집의로 전임하였고, 이어 동부승지•대사간•우승지를 지냈다. 1585년 부제학 김우옹(金宇顒)이 이이(李珥)•정철(鄭澈)이 행한 일을 논박하는 것을 반박하자, 선조는 그의 충절을 크게 칭찬하여 대사헌으로 특진시켰다. 뒤에 이이•박순(朴淳)•정철의 공적을 논하다가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경상도와 황해도의 관찰사로 전직되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인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대사간의 자리에서 난국을 수습하고, 이듬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또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1591년 황해도관찰사로 있다가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정철 등 서인이 화를 당하자 이에 연루, 곧 파직되어 고향인 보령에 내려가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扈從)하였고, 대사간•이조참판•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명나라 군대가 요양(遼陽)에 머물면서 진군하지 않자 그는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을 설득하여 명군을 조선으로 들어오게 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어서 군량을 조달하기 위하여 북도와 삼남지방의 도검찰사(都檢察使)로 나갔는데, 지난날의 선정에 감복하여 도민들이 적극 협조함으로써 무사히 해결하였다. 1594년에 대기근이 들자 동궁의 명을 받고 밤낮으로 구휼에 힘쓰다가 병을 얻어 죽었다. 1604년 호종공신(扈從功臣)2등에 책록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한흥부원군(韓興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성품이 소박하고 정직하여 이해득실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으며 시정에는 심신으로 다하였다. 보령의 화암서원(花巖書院), 서천의 건암서원(建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충간(忠簡)이다.
이 문서는 한국어 위키백과의 「이산보」 문서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r38465050)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원문 기여자 목록은 원문 역사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후 2:13 · r35724 · 문서 내용은 CC BY-SA 4.0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