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
1919년 11월 만주 길림에서 김원봉 등이 조직한 항일 무장 비밀 결사. 조선 총독부·경찰서·동양 척식 주식회사 등에 대한 폭탄 투척과 요인 암살 등 직접 행동으로 일제에 맞섰다.
시작~종료 1919년 11월 10일 ~ 1935년 7월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상세 타임라인
개요
의열단(義烈團)은 1919년 11월 중국 지린(길림)성에서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청년 13명이 결성한 항일 비밀 결사이다.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한다'는 뜻을 이름에 담았다. 식민 통치 기관 파괴와 일제 요인 암살을 통한 직접 행동으로 민중의 각성을 이끌어 내고자 했으며, 1920년대 국내외에서 수많은 의거를 일으켰다. 1920년대 후반부터는 조직적 무장 투쟁과 정당 운동으로 방향을 바꾸어 1935년 민족 혁명당 결성으로 이어졌다.
결성
3·1 운동의 평화적 시위가 일제의 무력 진압으로 좌절되자, 일부 청년들은 무력에 의한 직접 투쟁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1919년 11월 9일 밤 길림성 파호문 밖 중국인 반(潘)씨의 집에 모인 독립지사들은 밤새 논의한 끝에 이튿날인 10일 새벽 의열단을 조직했다. 신흥 무관 학교 출신이 중심이었고, 단원은 김원봉·윤세주·이성우·곽경·강세우·이종암·한봉근·한봉인·김상윤·신철휴·배동선·서상락·권준 등 13명이었다. 김대지·황상규가 고문으로 지도했고, 김원봉이 단장(의백)으로 뽑혔다(같은 사전의 「김원봉」 항목은 창단을 12월로 적는 등 날짜에 차이가 있다). 의열단의 근거지는 곧 베이징으로, 다시 상하이 일대로 옮겨졌다. 이들은 '공약 10조'를 정하고, 처단 대상인 '7가살(七可殺)'(조선 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대만 총독, 매국적, 친일파 거두, 적탐, 반민족적 토호열신)과 파괴 대상인 '5파괴'(조선 총독부, 동양 척식 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왜적 중요 기관)를 활동 목표로 삼았다.
주요 활동
- 1920년 9월 14일: 박재혁이 부산 경찰서에서 폭탄을 던져 서장을 죽거나 다치게 했다.
- 1920년 12월 27일: 최수봉이 밀양 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 1921년 9월 12일: 김익상이 전기 수리공으로 변장해 조선 총독부 청사에 폭탄을 던졌다.
- 1922년 3월 28일: 오성륜·김익상·이종암이 상하이 황포탄(황푸 부두)에서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저격했으나 실패했다.
- 1923년 1월: 신채호가 의열단의 요청으로 「조선 혁명 선언」을 지어 "민중 직접 혁명"과 폭력 투쟁의 정당성을 밝혔다. 같은 달 김상옥 의거가 일어났다.
- 1923년 3월: 국내에 대량의 폭탄을 들여오려던 계획이 발각되었다(황옥 경부 사건).
- 1924년 1월 5일: 김지섭이 도쿄 왕궁 니주바시에 폭탄을 던졌다.
- 1926년 12월 28일: 나석주가 서울의 동양 척식 주식회사와 조선 식산 은행에 폭탄을 던진 뒤 일본 경찰과 총격전 끝에 자결했다.
노선 전환
1920년대 중반 의열단은 개인 암살과 파괴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김원봉 등 단원들은 1926년 중국 황푸 군관 학교에 입교해 군사 훈련을 받았고, 1928년에는 대중 조직과 무장 투쟁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강령을 바꾸었다. 1932년 난징에 조선 혁명 군사 정치 간부 학교를 세워 간부를 길렀으며, 1935년 여러 독립운동 정당과 함께 민족 혁명당을 결성하면서 사실상 해체되었다. 김원봉은 이후 조선 의용대를 이끌었고, 1942년 한국광복군에 합류해 부사령관이 되었다.
평가
의열단의 의거는 일제 식민 통치에 큰 위협이 되었고, 민중의 항일 의식을 북돋웠다. 일제는 의열단을 가장 위험한 단체로 꼽아 김원봉에게 거액의 현상금을 걸었다. 반면 무고한 희생을 낳을 수 있는 폭력 노선에 대해서는 당시에도 독립운동 진영 안에서 논쟁이 있었다.
참고 자료
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 r358 · 문서 내용은 CC BY-SA 4.0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