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엽 (위)
유엽(劉曄, ? ~ 234년?)은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정치인이다. 자는 자양(子揚)이며 양주 구강군 성덕현(成悳縣) 사람이다. 광무제의 서자 부릉질왕의 후손이다.
출생~사망 171년 ~ 234년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후 2:12
유엽(劉曄, ? ~ 234년?)은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정치인이다. 자는 자양(子揚)이며 양주 구강군1 성덕현(成悳縣) 사람이다. 광무제의 서자 부릉질왕의 후손이다.2
행적
출사 전
7살 때, 어머니 수(脩)는 심한 병중에서 아버지의 시비를 제거하기를 유언했다. 13살 때 시비를 죽이고 어머니 묘에 참배했다. 친구 노숙에게 함께 회남에서 수만 명의 무리를 모으고 세력을 떨치고 있던 정보(鄭寶)를 섬길 것을 권했고, 노숙은 승낙했으나 중도에 주유의 권유로 마음을 바꾸어 손권을 섬겼다.
정보가 주민을 쫓아 장강 남쪽으로 건너가려고 했는데, 유엽이 고귀한 집안이며 명사이므로 유엽을 협박하여 이를 주도하게 하려고 했다. 마침 조조가 양주에 사자를 보내었는데, 유엽은 사자를 뵙고 양주의 사정을 설명하고 며칠 더 머무르게 했다. 정보가 사자를 맞이하여 대접하자, 유엽은 정보가 술에 취한 틈을 타 정보를 죽이려 했다. 그러나 정보가 술을 마시지 않아 정신이 말짱하여 틈을 노리기 어렵게 되자, 직접 정보의 머리를 베고 정보의 무리들을 위협하여 달아나게 했다. 나중에 정보의 진영을 찾아가 설득하여 주인을 잃은 정보의 무리들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자신이 한 왕실의 지파이므로 사병을 거느리려 하지 않고, 얻은 무리를 여강군태수 유훈에게 넘겨주었다.
손책이 유훈에게 뇌물을 주어 상료(上繚)를 공격할 것을 요청했다. 유엽은 이것이 유훈으로 상료를 공격하러 나간 틈에 여강을 차지하려는 손책의 계략임을 간파하고 유훈에게 이를 받아들이지 말도록 조언했으나, 유훈은 마침 원술의 잔당 등 귀의한 무리가 갑자기 늘어나 식량이 부족했으므로 이를 듣지 않고 상료를 공격하다가 과연 손책의 공격을 받아 본거지인 환성(皖城)을 잃고 조조에게로 달아났다.
출사 후
여강에는 산적 진란이 수만 명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조조가 여러 번 토벌군을 보냈으나 이기지 못했다. 조조가 수춘(壽春)에 이르자, 여러 신하들은 진란을 내버려 둘 것을 조언했는데, 유엽은 조조에게 진란을 무찔러 위세를 보일 것을 조언했다. 조조는 이를 받아들여 맹장을 써 진란을 토벌하고, 돌아오면서 유엽을 창조연(司空倉曹掾)에 임명했다. 조조가 를 토벌할 때 주부(主簿)로 전임되었다. 땅은 길이 험하고, 또 군량이 다했으므로 조조는 철수하면서 유엽에게 후군을 감독하게 했다. 유엽은 장로를 이길 수 있다고 보았으므로, 군량을 끊어 퇴각하지 못하게 했다. 과연 조조는 장로를 무찌르고 한중을 평정했다. 유엽은 조조에게 한중 점령으로 인해 두려워하고 있을 촉을 치도록 권하고, 또 촉이 안정되면 그때에는 이미 늦어 근심거리가 된다고 조언했으나, 조조는 듣지 않고 돌아갔다. 유엽은 행군가 되었고, 영군을 겸했다. 《부자》에 따르면, 7일 후 촉에서 온 투항자가 유비가 두려워하는 자들을 참했음에도 촉 사람들은 불안해 한다고 전했고, 조조는 유엽에게 촉을 쳐도 좋은지 물었는데, 유엽은 이제는 안정되었으니 칠 수 없다고 답했다. 이 위나라에 투항하여 의 총애를 받아 신성태수가 되었다. 유엽은 맹달에겐 충성심이 없고, 또 신성군은 국경의 요지이므로 이를 반대했으나 기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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