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
서희(徐熙, 942년~998년 음력 7월 14일)는 고려의 문신이다.
출생~사망 942년 ~ 998년 8월 8일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1:54
서희(徐熙, 942년~998년 음력 7월 14일1)는 고려의 문신이다.
960년(광종 11) 과거에 급제한 후 원외랑을 거쳐 병관어사로 재직 중, 993년(고려 성종 12년) 거란의 침입 때 거란 측 장수인 소손녕(蕭遜寧)과 담판을 하여 교전을 치르지 않고 후퇴시켰다.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郎平章事)를 거쳐 태보(太保)·내사령에 이르렀다. 시호는 장위(章威)이다. 1027년(현종 18)에 성종 묘정에 배향되었다.2
출생
서희의 외가 어르신 중 용이 구름에 걸려 추락하다 바다의 신의 도움을 받아 용궁으로 간 태몽을 꾼 사람이 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지리에 밝았고 무예에 능했다. 960년에 갑과로 과거에 급제한 뒤, 광평원외랑·내의시랑 등을 거쳐 983년 병관어사가 되었다.
993년 요 성종은 장수 소손녕과 80만 대군을 보내 고려를 공격하였다. 이에 고려 성종은 박양유, 서희, 최량 등을 보내어 싸우게 하였으나 패배하여 봉산군(오늘날 청천강 이북 지역)을 빼앗기고 말았다. 다시 고려 성종은 이몽전을 청화사로 보내 화의를 표명하였으나, 적장 소손녕은 항복만을 요구하였다. 이몽전이 침략의 이유를 묻자 “너희 나라가 백성을 돌보지 않으므로 천벌을 주러 온 것이다”라고 답했다.....
이몽전이 돌아와 보고하니 고려 조정은 혼란에 빠졌고, 어떤 신하는 투항을 주장했고, 다른 신하는 땅을 떼어주자는 할지론을 주장했다. 이때 서희가 나서서 투항론과 할지론이 모두 옳지 않음을 주장했다. 그때 서희는 요나라의 침공 이유가 소손녕이 밝힌 바와는 달리 고려와의 강화에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민관(民官) 이지백도 서희에게 동조하였다. 서희는 소손녕을 찾아가서 담판을 짓고 북쪽 땅을 얻었다.
성종이 서경에 행차하였을 때 미행으로 영명사에 가서 놀이를 하려 하자 놀이의 잘못됨을 상소, 간언하여 중지시켰다. 또 어가를 따라 해주에 갔을 때 임금이 그가 주둔하던 막사에 들어가고자 하니, “지존께서 임어하실 곳이 못 됩니다.”라고 거절하였으며, 성종이 그에게 술을 올리라고 명하자 “신의 술은 감히 드릴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여 결국 막사 밖에서 어주를 올렸다고 한다.
또한 공빈령 정우현이 봉사를 올려 ‘시정의 일곱가지 일’을 논한 것이 임금의 비위를 상하게 하자, 성종은 그를 내치려 하였으나 서희는 오히려 정우현의 논사가 심히 적절한 것이라고 변호하고 그 허물을 스스로에게 돌렸다. 그리하여 정우현은 감찰어사가 되고 서희는 말과 주과를 위로의 증표로 받았다고 한다.
996년에 병으로 사찰 개국사에 요양하게 되자 성종이 직접 왕림하여 어의 한벌과 말 세필을 각 사원에 나누어 시납하고, 개국사에 다시 곡식 1,000석을 시주하는 등 그가 완쾌되도록 쾌유를 기원하기도 했다. 998년 57세를 일기로 졸하자 부음을 들은 왕이 크게 슬퍼하며 베 1천 필, 보리 3백 석, 쌀 5백 석, 뇌원다 2백 각, 대다 10근, 전향 3백 량을 부의로 주었다. 시호는 장위이다. 1027년에 성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거란과의 담판
993년(성종 12년) 거란이 고려를 쳐들어왔는데
처음 소손녕은 "80만 대군이 왔다.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모두 죽일 것이다"라고 하며 고려의 항복을 종용했다. 이와 함께 소손녕은 압록강을 건너 봉산군에서 고려군과 첫 교전을 치러 고려군 선봉장을 붙잡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 소식이 함께 전해지자, 고려 조정은 큰 충격에 빠져 할지론으로 전쟁을 막자는 주장이 크게 일었고, 고려 성종도 서경의 쌀을 버리도록 칙명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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