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라실 전투(아랍어: معركة ذات السلاسل Dhat al-Salasil),1 흔히 사슬 전투라고 불리는 이 전투는 633년 4월 라시둔 칼리파국과 사산 페르시아 제국 사이에 벌어진 첫 번째 전투였다.2 이 전투는 카지마(현재의 쿠웨이트)에서 칼리드 이븐 알와리드의 군대와 호르모즈 휘하의 페르시아군 사이에 벌어졌다. 이 전투는 리다 전쟁이 끝나고 아라비아 반도가 칼리프 아부 바크르의 권위 아래 통일된 직후에 벌어졌다. 실제로 이는 라시둔 칼리파국의 무슬림 군대가 아라비아 밖으로 영토를 확장하기로 결정한 첫 전투였으며, 이로써 아랍의 정복이 시작되었다.3
배경
무타나 이븐 하리타 샤이바니는 페르시아 국경 가까이에 거주하던 북부 동부 아라비아의 부족장이었다. '배교 전쟁'이 끝난 뒤 무타나는 메소포타미아의 페르시아 도시들을 습격했다. 습격은 성공적이어서 상당한 전리품을 얻었다. 무타나 이븐 하리타는 자신의 성과를 알리기 위해 메디나로 가서 칼리프 아부 바크르를 만났고, 아부 바크르는 그를 자기 부족의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이후 그는 메소포타미아 깊숙이 습격을 이어 갔다. 경기병의 기동성을 이용하여 그는 사막 근처의 어떤 도시든 쉽게 습격한 뒤 다시 사막으로 사라질 수 있었고, 사산 군대는 그를 추격할 수 없었다. 무타나의 행동으로 아부 바크르는 사산 제국으로부터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하기로 결정했다. 승리를 확실히 하기 위해 아부 바크르는 두 가지 조치를 택했다. 군대를 전적으로 자원병으로 구성하고, 가장 뛰어난 장군인 칼리드 이븐 알와리드가 지휘하도록 한 것이다. 스스로 예언자라고 주장한 무사일리마를 야마마 전투에서 격파한 뒤에도 칼리드는 여전히 야마마 지역에 있었는데, 그때 아부 바크르가 그에게 사산 제국과 싸우라는 명령을 보냈다. 칼리드의 임무 목표를 알히라(메소포타미아의 한 지역)로 정한 아부 바크르는 증원군을 보냈고, 동부 아라비아 북부의 부족장들인 무타나 이븐 하리타, 마즈후르 빈 아디, 하르말라, 술마에게 칼리드의 지휘 아래 작전하도록 명령했다. 633년 3월 셋째 주 무렵(이슬람력 12년 무하람 첫째 주)에 칼리드는 1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야마마를 출발했다. 그러나 출발에 앞서 그는 국경 지역 다스트 메이산의 페르시아 총독 호르모즈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슬람에 복종하면 안전할 것이다. 아니면 지즈야 납부에 동의하라. 그러면 너와 네 백성은 우리의 보호 아래 있게 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그 결과는 너 자신의 탓일 뿐이다. 나는 네가 삶을 갈망하는 것만큼이나 죽음을 열렬히 바라는 사람들을 데리고 오기 때문이다.4
부족장들과 그들의 전사들(각각 2,000명)이 칼리드의 원정에 합류했다. 이렇게 하여 칼리드는 1만 8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페르시아 제국에 들어섰다.4 페르시아 지휘관은 황제에게 아라비아로부터 오는 위협을 알렸고, 많은 수의 기독교 아랍인 보조군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 전투를 위해 집결시켰다.
칼리드의 전략
사산 군대는 당시 가장 강력하고 장비가 잘 갖추어진 군대 중 하나였으며, 정면 대결 형식의 전투에 이상적인 병력이었다. 페르시아군의 유일한 약점은 기동성 부족이었다. 중무장한 페르시아 병사들은 빠르게 움직일 수 없었고, 오래 이동하면 금방 지쳤다. 반면 칼리드의 병력은 기동성이 있었다. 그들은 낙타를 타고 있었고, 기병 돌격을 위해 말도 준비되어 있었다. 칼리드의 전략은 자신의 속도를 이용하여 사산 군대의 기동성 부족을 파고드는 것이었다. 그는 페르시아군에게 행군과 반대 행군을 반복하게 하여 지치게 만든 뒤, 그들이 기진맥진했을 때 공격하려 했다. 지리적 조건도 칼리드 이븐 알와리드가 이 전략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우발라로 가는 길은 카지마를 거치는 길과 후파이르를 거치는 길, 두 가지가 있었다. 그래서 칼리드는 야마마에서 페르시아 지휘관 호르모즈에게 편지를 보내, 칼리드가 야마마에서 카지마를 거쳐 우발라로 가는 직통로로 올 것이라고 예상하게 했다.
전투
칼리드 이븐 알와리드가 카지마를 통해 올 것이라고 예상한 호르모즈는 우발라에서 카지마로 행군했다. 카지마에는 무슬림 군대의 흔적이 없었다. 곧 정찰병이 칼리드 이븐 와리드가 후파이르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가져왔다. 후파이르는 우발라에서 21마일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는 호르모즈의 기지를 위협하는 상황이었다. 우발라는 사산 제국의 중요한 항구였으며, 현재의 바스라 근처에 있었다. 호르모즈는 즉시 50마일 떨어진 후파이르로 이동할 것을 명령했다. 칼리드는 정찰병이 호르모즈의 급한 접근을 알려 올 때까지 후파이르에서 기다렸다. 칼리드는 사막을 지나 카지마 쪽으로 이동했다. 호르모즈는 후파이르에 도착했을 때 칼리드가 카지마를 향해 행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호르모즈는 무슬림에게 카지마로 가는 길을 내줄 수 없었기 때문에, 중무장한 사산 군대에게 다시 카지마로 출발하라고 명령했다. 페르시아군은 기진맥진한 상태로 카지마에 도착했다.
호르모즈는 즉시 중앙과 양 날개의 일반적인 대형으로 군대를 전투 배치했다. 양 날개를 지휘한 장군은 쿠바즈와 아노샤간이었다. 병사들은 서로를 사슬로 묶었는데, 이는 패배 시에도 전장에서 도망치기보다 죽기를 각오했다는 것을 적에게 보여 주는 표시였다. 사슬로 연결된 병사들은 기병대가 몇 명을 쓰러뜨리고 돌파구를 만드는 것을 어렵게 하여, 적 기병의 돌파 위험을 줄였다. 사산 군대는 정형화된 대형 전투에 맞게 조직되고 훈련되어 있었으므로, 이 전술 덕분에 적의 공격에 맞서 바위처럼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사슬에는 중대한 단점이 있었다. 패배할 경우 병사들은 후퇴할 수 없었고, 사슬이 족쇄가 되었다. 이 전투가 '사슬'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이 사슬 사용 때문이다.5 호르모즈는 카지마의 서쪽 가장자리 바로 앞에 군대를 배치하여 도시를 자신의 진형으로 가려 두었다. 칼리드는 패배 시 후퇴할 수 있도록 사막을 등지고 군대를 배치했다. 지친 페르시아군은 공격을 오래 버틸 수 없었고, 무슬림군은 여러 곳에서 페르시아 전선을 성공적으로 돌파했다. 패배를 감지한 양 날개의 페르시아 지휘관 쿠바즈와 아노샤간은 후퇴를 명령했고, 이는 전면적인 퇴각으로 이어졌다. 사슬에 묶이지 않은 대부분의 페르시아 병사들은 도망칠 수 있었지만, 사슬로 함께 묶인 병사들은 빨리 움직일 수 없어서 수천 명이 살해되었다.
여파
사슬 전투 이후 칼리드는 세 차례 더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파했고, 자신의 목표인 알히라를 점령했다. 알히라는 유프라테스 강 서쪽의 사산 제국의 주요 요새이자 이라크 내륙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6 첫 번째 이라크의 무슬림 정복은 4개월 안에 완료되었다. 사산 측이 증원군을 명령했기 때문에 아부 바크르는 칼리드에게 사산 영토 깊숙이 진격하라고 지시하지 않았다. 칼리드의 명령은 이제 히라의 페르시아 주민들을 회유하는 것이었다. 9개월 후 아부 바크르는 그를 시리아의 무슬림 정복의 지휘관으로 보냈다.
온라인 자료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