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섭
부섭(傅燮, ? ~ 187년)은 후한 말의 정치가로, 자는 남용(南容)이며 양주(凉州) 북지군(北地郡) 영주현(靈州縣) 사람이다.
출생~사망 연도 미상 ~ 187년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후 2:20
문서 정보
- 출생 ~ 사망
- 연도 미상 ~ 187년
- 출생
- 양주 북지군 영주현
- 사망
- 187년
- 성별
- 남성
- 국적
- 후한
- 직업
- 정치가
부섭(傅燮, ? ~ 187년)은 후한 말의 정치가로, 자는 남용(南容)이며 양주(凉州) 북지군(北地郡) 영주현(靈州縣) 사람이다.
생애
조정에서의 행적
키가 8척(尺)이었으며, 용모가 위엄이 있었다. 본래 자는 유기(幼起)였으나, 공자(孔子)의 제자 남용(南容)이 《시경(詩經)》의 백규(白圭)를 하루에 세 번 읽었다는 사실에 감복하여 자를 바꾸었다.
젊었을 때 태위(太尉) 유관(劉寬)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효렴(孝廉)에 두 번 천거되었으나 그를 천거한 태수의 부음을 듣자 관직을 버리고 상복을 입었다.
이후 호군사마(護軍司馬)가 되었고, 좌중랑장(左中郞將) 황보숭(皇甫嵩)과 함께 장각(張角)을 토벌하였다.
부섭은 전부터 환관을 혐오하여 천자에게 상주하였다.
부섭은 장각을 물리치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후(侯)에 봉해질 만한 것이었으나 환관 조충(趙忠)이 그의 상소를 보고 그를 미워하였기 때문에 영제(靈帝)에게 그를 무고하였다. 영제는 부섭이 한 말을 기억하여 그를 벌하지 않았으나, 후(侯)에 봉하지는 않았으며 그를 안정군(安定郡)1의 도위(都尉)로 전임시켰다. 이후 부섭은 병을 얻어 사임하였고, 다시 의랑(議郞)으로 전임되었다.
서쪽의 강(羌)이 반역하여 변장(邊章) · 한수(韓遂)가 난리를 일으켰을 때, 양주는 전국에서 군세와 물자를 모아두었었다. 때문에 사도(司徒) 최열(崔烈)은 공경 백관이 모은 회의에서 양주를 버릴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자 부섭은 목소리를 드높이며 최열을 죽여 천하를 안정시키자고 하였고, 상서랑(尙書郞) 양찬(楊贊)이 부섭이 대신을 모욕하였다고 상주하였기 때문에 영제는 부섭을 불러 문책하였다. 부섭이 답하였다.
영제는 부섭의 말이 옳다고 여겼고, 이후 그를 존중하였다.
조정을 떠나다
이후 거기장군(車騎將軍)이 된 조충은 조칙으로 황건적 토벌의 논공행상을 하였는데, 집금오(執金吾) 견거(堅擧) 등이 **"부남용(傅南容 ; 부섭)이 공적을 세웠는데도 후에 봉해지지 않아, 천하가 실망하고 있습니다. 현자를 등용하여 민심을 따르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조충에게 일렀다. 조충은 그 말에 따라 아우인 성문교위(城門校尉) 조연(趙延)을 사자로 보냈는데, 태도가 매우 은근하였다. 부섭은 안색을 바로잡고 **"이 부섭이 어찌하여 사사로이 포상을 구하겠습니까?"**라고 말하며 거절하였다. 조충은 더더욱 그를 미워하였으나, 그의 명성을 두려워하여 해칠 수 없었다. 많은 귀인과 권력자들 또한 그를 미워하였기 때문에 부섭은 조정에 계속 있을 수 없었고, 한양태수(漢陽太守)가 되어 조정을 떠났다.
한양태수 범진(范津)은 인물을 보는 안목이 있어, 본디 부섭을 효렴에 천거한 자였기 때문에 부섭이 후임으로 오리라는 것을 알았다. 고향 사람들은 이를 영예로운 것으로 여겼다. 부섭은 백성들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킨 강족들도 그의 은혜에 감복하여 항복하러 왔다. 또한 토지를 개간하여 40여 (里)의 진영을 둔전으로 이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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