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포 해전
1592년 음력 9월 1일 이순신·이억기·원균의 연합 함대 166척이 일본군의 본거지 부산포에 들어가 정박한 일본 배 100여 척을 깨뜨린 해전. 녹도만호 정운이 전사하였다.
시작 1592년 10월 5일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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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부산포 해전은 1592년 음력 9월 1일(양력 10월 5일) 일본군의 상륙 거점이자 보급 기지였던 부산포(지금의 부산 동구·중구 앞바다)에서 벌어진 싸움이다. 이순신의 제4차 출전으로, 조선 수군이 일본군의 본진을 직접 공격하였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조선 함대는 판옥선 74척, 협선 92척 등 166척이었고, 부산포에는 400~470여 척의 일본 배가 있었다. 조선 수군은 100여 척을 깨뜨렸으나, 이순신이 아끼던 녹도만호 정운(鄭運)이 전사하였다.
배경
한산도 대첩 이후 일본 수군은 해전을 피하고 부산 일대에 배를 모아 지켰다. 육지에서는 평양의 고니시 군과 한양의 일본군이 경상도를 거쳐 부산으로 이어지는 길로 보급을 받고 있었다. 이순신은 일본군이 부산 쪽으로 물러날 기미가 있다는 보고를 받고, 그 근거지를 쳐서 바닷길을 끊고자 하였다.
경과
- 8월 24일: 이순신과 이억기가 여수를 떠났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제4차 출전을 8월 24일~9월 2일로 적는다.
- 8월 25일: 원균의 함대가 합류하였다(위키백과).
- 8월 29일: 낙동강 어귀의 장림포에서 일본 배 몇 척을 깨뜨렸다.
- 9월 1일 아침: 함대는 가덕도를 떠나 몰운대를 돌아 부산 쪽으로 나아갔다. 가는 길에 화준구미, 다대포, 서평포, 절영도 등에서 일본 배 24척을 잇따라 깨뜨렸다(위키백과).
- 부산포 공격: 부산포 안에는 일본 배 수백 척이 동쪽 해안을 따라 정박해 있었고, 일본군은 산 위와 해안의 진지에서 조총과 대포를 쏘며 맞섰다. 조선 함대는 장사진(長蛇陣)으로 포구에 들어가 정박한 배들을 화포로 공격하였다. 일본군은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가 산 위에서 사격하였다.
- 정운 전사: 우부장 녹도만호 정운은 앞장서 싸우다가 적의 대포에 맞아 전사하였다.
- 해 질 무렵: 100여 척을 깨뜨렸으나, 뭍에 오른 일본군이 많고 날이 저물어 상륙하여 싸우기는 어렵다고 판단하고 함대를 물렸다.
- 9월 2일: 함대는 가덕도로 물러났다가 여수로 돌아갔다.
결과와 영향
부산포 해전으로 일본 수군은 다시 큰 손실을 입었고, 조선 수군은 일본의 본거지까지 위협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조선 측 피해는 전사 6명, 부상 25명이었다. 다만 부산의 일본군 육상 진지는 그대로 남아 있었고, 이순신은 육군의 지원 없이는 부산을 빼앗을 수 없다는 점을 장계에서 밝혔다. 이후 일본 수군은 더욱 해전을 피하고 왜성과 포구에 웅거하는 전략을 택하였다.
이순신은 정운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여 제문을 지었으며, 정운은 뒤에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부산 다대포 몰운대에는 정운공 순의비가 있다.
이설
부산포에 있던 일본 배의 수는 400여 척, 430여 척, 470여 척 등으로 전하며, 격파한 수도 100여 척(장계)과 128척 등으로 다르게 적힌다.
참고 자료
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 r261 · 문서 내용은 CC BY-SA 4.0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