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미
반미(潘美)는 북송 초기의 장군이다. 자는 중순(仲詢)이다. 위주 대명현 사람이다. 북송이 남한을 멸망시킨 전쟁에서 지휘를 맡았으며, 관직은 객성사에 이르렀다.
출생~사망 925년 ~ 991년 7월 15일마지막 수정 2026. 10. 16. 오후 4:27
문서 정보
- 출생 ~ 사망
- 925년 ~ 991년 7월 15일
반미(潘美, 병음: Pān Měi, 동광 3년(925년) - 순화 2년 6월 7일(991년 7월 20일))는 북송 초기의 장군이다. 자는 중순(仲詢)이다. 위주 대명현 사람이다. 북송이 남한을 멸망시킨 전쟁에서 지휘를 맡았으며, 관직은 객성사에 이르렀다.
경력
반미와 송 태조 조광윤은 친하였고, 조광윤이 정권을 잡은 뒤에도 중용되었다. 이중진의 반란을 평정하는 전투에도 참가하여 양주와 담주를 지켰고, 방어사까지 승진하였다. 개보 3년(970년), 행영병마도부서가 되어 군대를 이끌고 남한을 평정하였다. 이는 반미가 하주를 포위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남한의 장군 오언유가 이끄는 3만의 군대가 구원하러 오자, 반미는 이보다 10킬로미터 물러나 남향안에 병력을 배치하고, 남한군을 크게 격파하여 오언유를 사로잡았다. 이어서 소주·계주·연주를 함락하고, 나아가 소주에 다가갔다. 이승악을 조주 연화봉에서 다시 격파하고 소주를 점령하였다. 이때 남한의 군주가 항복하였다.
후에 광주 지주에 임명되었으며, 시박사를 겸하였다. 산남동도 절도사로 승진하였다. 개보 7년(974년), 승주(현재의 장쑤성 난징시) 서남면행영마보군전도감에 임명되어, 도부서 조빈의 남당 정벌을 도왔다. 남당을 평정하자 검교태부·선휘북원사가 더해졌다. 태평흥국 4년(979년) 정월, 북로도초토제치사에 임명되어 태종 조광의를 따라 북한 정벌에 나섰다. 북한이 항복한 뒤, 지 유주(현재의 베이징) 행부사에 임명되었고, 태종을 따라 요에 대한 북벌에 참가하였으나 패하여 귀국하였다. 같은 해 8월, 하동 삼교구도부서에 임명되어 서북 변방을 지키며 요를 압박하였다. 안문에서의 승리로 대국공에 봉해졌고, 후에 충무군 절도사로 바뀌었다.
옹희 3년(986년), 송군은 세 갈래로 나뉘어 북벌에 나섰는데, 반미는 운주(현재의 산시성 다퉁시)·응주(현재의 산시성 응현)·환주(현재의 산시성 숴저우시 숴청구)·삭주(현재의 산시성 숴저우시 숴청구) 등의 주 행영도부서가 되었고, 양업이 그 부장이 되었다. 서로군을 이끌고 안문을 나가 승리를 이어갔다. 얼마 후 조빈이 이끄는 동로군이 기구관 전투에서 패하였으므로, 반미 등은 철수하였고, 운주·응주의 백성을 내지로 데려오라는 내용의 조서를 받았다. 철수 도중, 반미와 왕신 등은 양업에게 굳이 적을 맞아 싸우도록 강요하여, 필패의 땅에 두고 그를 사지로 몰아넣었다. 양업의 군대는 진가곡(현재의 산시성 신저우시 닝우현)에서 전멸하였고, 양업 자신은 포로가 되어 단식하다 죽었다. 이로 인해 반미는 관위가 세 계급 깎여 검교태보로 강등되었다. 이듬해 원래 관직을 회복하였다. 순화 2년(991년), 동평장사가 더해졌으나 수개월 후 사망하였다.
진종의 첫 번째 정실 반씨(장회황후)는 반미의 딸(또는 손녀)이다.
참고 문헌
- 『송사』 권258 반미전
이야기책과 경극에서의 형상
- 『양가장』: 반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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