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스의 음모(포르투갈어: Inconfidência Mineira)는 1788년부터 1789년까지 포르투갈 통치 아래 있던 브라질 식민지에서 계획된 반란이다.
배경
폼발 후작이 포르투갈 본국에서 국정을 장악하고 있던 18세기 후반에 브라질의 수출 경제는 크게 발전하였으나, 동시에 사회의 모순도 뚜렷해졌다1. 폼발 후작이 실각한 뒤에도 그의 경제 정책은 계승되었지만, 포르투갈 본국 본위의 방침은 더욱 뚜렷해졌다2.
브라질의 금과 다이아몬드 산출량이 감소하자, 포르투갈 왕실은 금에 대한 세금 징수를 강행하고, 밀무역 단속을 강화하며, 육류와 곡물 등에 부과하는 소비세를 인상하는 방식으로 재정 적자를 메우려 하였다3. 1783년 금의 밀수를 단속하기 위해 쿠냐 메네제스가 미나스제라이스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부패에 빠진 메네제스는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3. 1785년 본국에서 브라질의 신규 공장 설립과 기존 공장의 가동을 금지하는 칙령이 내려지자, 섬유 산업에 종사하던 미나스제라이스의 기업가들은 타격을 입었다2.
1788년 7월 포르투갈 본국은 메네제스를 대신하여 루이스 데 멘동사를 새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미나스에서는 금이 고갈되고 통치에 불만을 품은 식민지인들의 저항으로 인해 킨토 세금(5분의 1세)이 체납되고 있었으므로, 멘동사는 세금의 강제 징수(데라마 징수)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징수 대상은 광산주만이 아니라 미나스의 모든 주민이었으며, 그들을 파멸로 몰아넣을 만큼의 징수액이 산출되었다4. 본국 본위의 정책에 빌라리카의 엘리트층은 강하게 반발하였고, 그들 가운데 포르투갈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꾀하는 집단이 나타났다2.
경과
멘동사의 정책에 맞서, 티라덴치스(실바 샤비에르), 미나스의 용기병 대장 프레이레 데 안드라지, 신부 로린, 신부 톨레도, 대농장주이자 시인이기도 한 알바렝가 페이쇼투, 군 지휘관의 아들 조제 마시에우 등은 회합을 열어 식민지 정부에 대한 반란과 브라질의 독립을 계획하였다5. 반란 참가자의 대부분은 식민지의 엘리트층이었으나, 티라덴치스는 그들과 달리 비엘리트층에 속해 있었다6.
1788년 말 안드라지의 자택에서 두 차례 회합이 열려, 미나스에서의 봉기와 리우데자네이루, 상파울루와의 공동 작전이 검토되었다5. 이윽고 반란 참가자들은 현지 엘리트층의 지지를 얻어 1789년 데라마 징수일에 봉기하기로 결정하였다5. 반란자들은 상주앙 지 델 레이를 장래의 수도로 정하고, 빌라리카에 대학을 세우고, 민병대를 편성하며, 화약 공장과 조폐국을 설립하려 하였으나, 노예제 폐지는 보류되었다2. 그리고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시 『에클로가』에서 빌려온 "비록 늦더라도, 자유를"이라는 구절과 삼각형을 배치한 국기를 채택하기로 결정하였다7. 참고로 이 깃발은 훗날 1962년 11월 27일에 중앙의 삼각형을 빨간색으로 바꾸어 미나스제라이스주의 주기로 제정되었다8.
1789년 3월5, 계획에 가담하고 있던 한 광산주가 국고에 진 빚을 감면받는 대가로 식민지 정부에 반란 계획을 밀고하였다2. 호아킹 실베리오의 밀고를 받은 멘동사는 모든 참가자를 체포하기 위해 데라마 징수의 중지를 명령하였다9. 한편 티라덴치스는 반란의 지지자를 얻으려고 리우로 갔고, 티라덴치스를 쫓아 리우로 향한 실베리오는 브라질 부왕 루이스 데 바스콘셀루스에게 반란의 전모를 보고하였다10. 식민지 정부는 리우에 있는 티라덴치스의 동향을 감시하였고, 티라덴치스는 바스콘셀루스에게 감시의 필요성을 묻고 여권 발급을 요구하였으나 그의 요구는 거절되었다10. 자신이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음을 깨달은 티라덴치스는 친구의 집에 몸을 숨겼지만 체포되었다10.
5월 10일 티라덴치스의 체포를 계기로 참가자들은 일제히 적발되었고,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5. 심문은 3년에 걸쳐 진행되었고, 1792년 4월 18일 판결이 내려졌다. 티라덴치스를 비롯한 11명에게 교수형이 선고되었고, 나머지 6명은 유형에 처해졌다11. 그러나 판결이 내려지기 전에 판사들은 마리아 1세가 내린 '관용의 서한'을 받아 두었고, 판결이 나온 지 몇 시간 뒤 티라덴치스를 제외한 10명에게 유형으로의 감형이 선고되었다12. 1792년 4월 21일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티라덴치스의 교수형이 집행되었다2. 정부는 식민지를 위압하기 위해 한 연대만 남기고 리우의 모든 군대에 처형 참여를 명령하였고, 교수형이 집행되는 광장에는 많은 구경꾼이 모였다12. 처형장으로 향하는 티라덴치스의 뒤를 많은 주민이 따랐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티라덴치스의 모습은 민중에게 감동을 주었다고 전해진다13. 티라덴치스의 시신은 토막 났고, 본보기로 머리는 빌라리카에, 나머지 부위는 미나스와 리우 사이 도로에 세워진 말뚝에 매달려 효수되었다14.
결과
반란의 근간에는 자유주의 사상과 미국의 독립이 있었으며51516, 식민지의 상층부가 주요 주도 세력이었다617. 당시 브라질에는 고등교육 기관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유층 자제 대부분은 유럽으로 유학을 갔고,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자유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반란에 가담하였다15. 경제·사회 기반이 노예제에 의존하는 식민지 지배 구조상, 식민지의 독립에 있어 노예제 폐지라는 문제의 처리는 피할 수 없었다17.
식민지 주민을 위협하기 위해 포르투갈 왕실이 꾸민 대규모 처형은 오히려 반란과 참가자에 대한 공감을 각인시켰다1318. 사건의 명칭인 '인콘피덴시아(Inconfidência)'는 충성심의 결여, 국왕·국가에 대한 의무의 불이행을 뜻하는 부정적 의미를 담은 말이지만, 이후 시대에도 계속 사용되었다18. 정부는 식민지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데라마 징수의 중지와 소금 독점 판매의 폐지를 결정하였으나, 식민지에 싹튼 독립에 대한 열망을 억누르지는 못하였다14. 이 사건은 부정적으로 평가되었으나, 1889년 공화국 선언 이후 평가는 뒤바뀌었다18. 처형된 티라덴치스는 브라질 독립 운동의 선구자로 칭송받았으며, 그가 처형된 4월 21일은 브라질의 공휴일로 제정되었다2.
참고 문헌
- 金七紀男『ブラジル史』(東洋書店, 2009年7月)
- 鈴木茂「独立か死か」『概説ブラジル史』収録(山田睦男編, 有斐閣選書, 有斐閣, 1986年2月)
- 辻原康夫 編『世界の国旗大百科』(人文社, 2002年3月)ISBN 4-7959-1281-5
- ボリス・ファウスト『ブラジル史』(鈴木茂訳, 世界歴史叢書, 明石書店, 2008年6月)
- A.ソウト・マイオール『ブラジル』(富野幹雄編訳, 世界の教科書=歴史, ほるぷ, 1982年8月)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