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해 지대는 1914년부터 1917년까지 진행된 어니스트 섀클턴의 제국 남극 횡단 탐험대에서 남극 횡단을 보조하는 임무를 맡은 부대이다. 그 임무는 로스해에서 베어드모어 빙하까지 그레이트 아이스 배리어를 가로질러 물자 보급소를 차례로 설치해 나가는 것이었으며, 그 경로는 이전의 남극 탐험에 의해 이미 개척되어 있었다. 제국 남극 횡단 탐험대의 본대는 섀클턴이 지휘하여 남극 대륙의 반대편 웨델해 연안에서 상륙한 뒤 남극점을 거쳐 로스해로 빠져나올 예정이었다. 본대는 전체 여정을 위한 연료와 식량을 모두 싣고 가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 성공은 전체 여정의 마지막 4분의 1 구간에서 로스해 지대가 설치할 보급소의 물자에 의존하도록 되어 있었다.
1914년 8월, 섀클턴은 탐험선 인듀어런스호를 타고 런던을 출항하여 웨델해로 향하였다. 한편 로스해 지대의 대원들은 오스트레일리아에 모여, 두 번째 탐험선 오로라호를 타고 로스해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조직과 자금 문제로 출발이 지연되어 1914년 12월에야 겨우 출항할 수 있었는데, 이는 첫 번째 시즌에 보급소를 설치할 수 있는 기간이 짧아졌음을 의미하였다. 로스해에 도착한 뒤 경험이 부족한 이 부대는 남극에서 이동하는 기술을 익히느라 고전하였고, 그 과정에서 썰매를 끄는 개의 대부분을 잃었다. 남극의 겨울이 시작될 무렵, 격렬한 폭풍 중에 오로라호를 묶고 있던 밧줄이 끊어져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고, 육상 부대는 고립되는 불운을 겪었다.
이러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로스해 지대는 대원 간의 논쟁, 혹독한 기상, 대원의 질병과 세 명의 사망을 극복하고 남극에서의 두 번째 시즌에 임무를 완수하였다. 섀클턴의 본대는 인듀어런스호가 웨델해의 얼음에 갇혀 부서졌기 때문에 상륙하지 못하였으므로, 로스해 지대의 성공은 결국 의미를 잃었다. 섀클턴은 대원들을 최종적으로 안전한 곳까지 철수시킬 수 있었지만 대륙 횡단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로스해 지대가 설치한 보급 물자는 사용되지 않았다. 로스해 지대는 1917년 1월까지 고립되어 있었으나, 뉴질랜드에서 수리되고 다시 장비를 갖춘 오로라호가 도착하여 구조하였다. 로스해 지대의 공적이 대중에게 인식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대원이 동료의 생명을 구한 공로로 네 명에게 앨버트 메달이 수여되었으며, 그중 두 명은 사후에 수여되었다. 섀클턴은 훗날 이 로스해 지대에서 사망한 대원들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프랑스와 플랜더스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과 같은 정도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기록하였다1.
배경
1911년 12월 로알 아문센이 남극점을 정복한 뒤, 역시 남극점을 목표로 하고 있던 섀클턴은 극지에 대한 큰 포부를 재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그는 "남극 탐험에는 하나의 큰 목표, 즉 바다에서 바다까지 남극 대륙을 횡단하는 일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2. 그는 이전에 스코틀랜드의 탐험가 윌리엄 스피어스 브루스가 수립한 계획에 이 전략을 겹쳐 놓았고, 본대가 가능한 한 남극점에 가까운 웨델해 연안에서 상륙하는 작전을 세웠다3. 이 남극 횡단 본대는 남극점을 향해 가며, 극지 고원을 가로질러 베어드모어 빙하를 내려가고(섀클턴 자신이 님로드 탐험대에서 발견한 곳이다), 그레이트 아이스 배리어에 이르는 경로를 그렸다. 마지막 구간은 배리어를 가로질러 로스 해안의 맥머도 사운드에 이르는 것이었다23.
섀클턴은 이 전체 여정의 길이를 1,800마일(2,900km)2로 추정했으며, 그 모든 물자를 가지고 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본대의 여정을 지원하기 위해, 로스해 지대가 맥머도 사운드에 상륙하여 배리어를 따라 폭 400마일(640km)에 걸쳐 일련의 보급소를 설치하고, 본대의 마지막 구간을 지원하는 계획을 세웠다2. 이 부대는 과학적 관측도 수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섀클턴은 이 보급소를 설치하는 여정이 전체 계획의 성공에 중요하다고 말하였지만, 그 실행에 그다지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4. 로스해 지대가 사용할 배는 SY 오로라호였으며, 이 배는 최근까지 더글러스 모슨의 호주 남극 탐험대가 사용하던 배였다2.
인원
로스해 지대를 이끌도록 섀클턴은 이니어스 매킨토시를 선택하였다. 그는 처음에 해군본부를 설득하여 매킨토시와 함께 해군 수병을 제공받으려 하였다5. 매킨토시는 섀클턴과 마찬가지로 전직 상선 해군 장교였으며, 님로드 탐험대에도 참가했으나 사고로 오른쪽 눈을 잃었기 때문에 남극에서의 경험은 짧은 것이었다6. 님로드 탐험대에 참가한 또 한 명의 베테랑은 어니스트 조이스였는데, 그의 남극 경험은 로버트 팰컨 스콧 대령의 디스커버리호 원정에서 시작되었고, 개썰매를 맡도록 지명되어 있었다. 섀클턴의 전기 작가 롤런드 헌트퍼드는 조이스를 "사기꾼, 화려함과 능력이 기묘하게 뒤섞인 인물"이라고 표현하였으나, 님로드 탐험대 때 조이스가 보급소 설치 여정에서 보여준 행동이 섀클턴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7. 영국 해군의 하사관 어니스트 와일드가 아마도 그의 형 프랭크 와일드의 추천으로 합류하였다. 프랭크 와일드는 인듀어런스호에서 섀클턴의 부대장으로 따라갔던 인물이다8.
대원의 지명은 일부 매우 급하게 이루어졌으며, 이는 섀클턴이 조직 준비 단계에서 매우 제한된 시간만을 가졌던 것을 반영하였다. 영국-인도 증기선 운항 회사 출신의 젊은 장교 조지프 스테인하우스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런던으로 여행하여 섀클턴과의 면담을 요청한 뒤 오로라호의 일등항해사로 지명되었다9. 스코틀랜드 성공회의 성직자이자 전직 교장이었던 아널드 스펜서 스미스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종군하기 위해 부대를 떠난 대원의 후임으로 참가하였다10. 빅터 헤이워드는 모험에 관심이 많은 런던의 금융 관련 사무원이었으며, 캐나다의 목장에서 일한 적이 있다는 이유로 채용되었다11.
로스해 지대의 주된 역할은 보급소를 설치하는 것이었지만, 섀클턴의 계획은 과학 팀이 해당 지역에서 생물학, 기상학, 자기학 관측을 수행하는 것도 요구하였다. 과학 책임자는 스코틀랜드의 지질학자이자 원래 신학생이었던 알렉산더 스티븐스였다12. 21세의 케임브리지 대학교 졸업생 존 콥은 생물학자였다. 그는 의학을 지망하고 있었으며, 나중에 선의(船醫)가 되었다13.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다른 두 명의 과학자가 추가로 합류하였다. 물리학자 딕 리처즈(주급 1파운드라는 통상 임금으로 계약하였다)와 공업화학자 키스 잭이었다. 스펜서 스미스의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던 사촌 어빈 게이즈는 일반 조수로 채용되었다13.
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문제
매킨토시와 부대의 핵심 인원은 1914년 10월 하순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오로라호가 남극 항해를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광범위한 수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게다가 섀클턴은 모슨으로부터 이 배를 인수한 조건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섀클턴의 이름으로 한 선적 등록조차 제대로 완료되어 있지 않았다1415. 모슨은 배에 실린 장비와 물자의 대부분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하였고, 기본적인 항해 장비와 선실에 필요한 것까지 모두 교체해야 했다14.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든 것은 섀클턴이 매킨토시가 사용할 수 있는 탐험 자금을 2,000파운드에서 1,000파운드로 줄였다는 점이었고, 그는 물자의 무상 제공을 간청하거나 배를 저당 잡히는 방법으로 차액을 메우기를 기대하고 있었다16. 대원의 급여나 생활비 등에 쓸 수 있는 현금은 없었다17.
당시 섀클턴은 인듀어런스호를 타고 남극을 향하고 있었으므로 연락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14.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탐험의 유명한 후원자는 에지워스 데이비드였는데, 그는 님로드 탐험대에서 과학 책임자를 맡았으며 매킨토시 부대가 처한 곤경과도 관련이 있었다. 그들은 탐험을 움직일 만큼의 자금을 모으는 데 기여하였지만, 대원 중 몇 명이 사직하여 모험을 그만두었다18. 출항 직전에 채용된 인물은 애드리언 도넬리였는데, 그는 원래 기관차 기술자였고 바다 경험은 없었으며, 2등 기관사로 계약하였다. 무선 통신사 라이오넬 훅은 아직 18세였으며, 전기를 배우는 중이었다13.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오로라호의 준비가 진행되어, 1914년 12월 15일 시드니를 출항하여 12월 20일 태즈메이니아의 호바트에 도착하였고, 남쪽으로 향하기 전에 마지막 물자와 연료를 보급하였다. 12월 24일, 당초 계획보다 3주 늦게 남극을 향해 출항하였으며, 로스 섬에는 1915년 1월 16일에 도착하였다. 매킨토시는 1910년부터 1913년까지의 테라노바 원정에서 로버트 스콧 대령이 기지로 삼았던 에번스 곶에 해안 기지를 세우기로 결정하였고, 오로라호를 위한 안전한 겨울 정박지를 그 근처에서 찾았다19.
第1シーズン 1914年–1915年
補給所設置、1915年1月–3月
매킨토시는 섀클턴이 첫 시즌에 대륙 횡단을 시도할지도 모른다고 보고, 남위 79도, 배리어 위에서 뚜렷한 표지가 되는 민나 블러프와 남위 80도 두 곳에 지체 없이 보급소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매킨토시의 견해로는 이 보급소들은 섀클턴의 대원들이 살아서 배리어를 횡단할 수 있게 해 주는 최소한의 것이었다20. 《오로라호》가 남극에 도착하는 것이 늦어진 탓에, 개와 훈련되지 않은 대원들은 환경에 적응할 시간이 거의 없었고, 그 다음에 어떻게 진행할지에 대해 의견이 갈렸다. 어니스트 조이스는 이 대원들 가운데 남극에서의 경험이 가장 많았지만, 신중한 방식을 선호해 최소한 1주일은 출발을 늦추기를 원했다2021. 조이스는 섀클턴이 개썰매 활동에 관해서는 조이스에게 지배권을 주었다고 주장했으나, 매킨토시는 이를 부정했고, 나중에는 근거가 없다고 논증했다22.
매킨토시의 견해가 받아들여져, 1915년 1월 24일 세 개의 개썰매 대 가운데 첫 번째가 배리어 여행을 떠났고, 다른 두 대도 다음 날 출발했다. 개를 어디까지 데려갈지에 대해서는 조이스와 매킨토시 사이에 또 다른 의견 차이가 생겼다. 조이스는 민나 블러프보다 먼저 개를 데려가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매킨토시는 서두르고 있었고 남위 80도까지 데려가야 한다고 주장했다23. 모터 구동 썰매로 물자를 운반하려는 시도도 실패했다24. 결국 보급 물자는 민나 블러프와 남위 80도 양쪽에 둘 수 있었지만, 전체적인 운용이 문제가 되었다. 물자 전부가 보급소까지 운반되지는 못했다25. 모터 구동 썰매와 마찬가지로, 이 여행에 데려간 개 10마리 모두가 귀환 도중에 죽었다26. 모든 대가 3월 25일에 햇 포인트까지 돌아왔지만27, 그때까지 대원들은 지쳐 있었고, 동상에 걸렸으며, 매킨토시도 자신감을 상당히 잃고 있었다28. 맥머도 해협의 해빙 상태 때문에 에번스 곶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했고, 대원들은 6월 1일까지 그곳에서 발이 묶여 검소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식량과 연료는 물개의 살코기와 지방에 의존했다29.
이 최초의 보급소 설치 여행과 그때 겪은 어려움은 결국 불필요했던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섀클턴은 1914년 12월 5일(《인듀어런스호》가 웨델해를 향해 사우스조지아를 출항한 날)에 사우스조지아에서 《데일리 크로니클》의 어니스트 페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번 시즌에는 대륙을 횡단할 기회가 없다"고 써 두었다. 매킨토시는 이 사실을 통보받았어야 했지만, "전보는 끝내 보내지지 않았다"고 한다30.
《오로라호》의 상실
자세한 내용은 「오로라호 표류」를 참조
매킨토시는 1915년 1월 25일 보급소 설치 여행을 떠날 때 《오로라호》를 일등항해사 조지프 스텐하우스의 지휘에 맡겼다31. 스텐하우스의 임무에서 최우선 사항은, 에번스 곶과 햇 포인트 사이로 튀어나와 있던 빙설 혀(氷舌)보다 남쪽에는 정박하지 말라는 섀클턴의 지시에 따라 겨울 정박지를 선정하는 것이었다32. 그 탐색은 길고 장애가 많은 과정이 되었다. 스텐하우스는 만 안에서 여러 주 동안 배를 몰았고, 결국 에번스 곶 기지에 가까운 곳에 정박하기로 결정했다. 3월 11일 햇 포인트를 방문해 보급소 설치 여행에서 일찍 돌아와 있던 4명을 태우고, 배를 에번스 곶 앞으로 옮겨 닻과 굵은 밧줄로 고정한 뒤, 그 후에는 해안의 얼음에 갇히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33.
5월 7일 밤, 거센 바람이 일어 《오로라호》를 그 계류지에서 날려 보내, 큰 부빙과 함께 바다로 나가게 했다. 무선 통신으로 육상 부대와 접촉을 시도했으나 헛수고였다. 《오로라호》는 얼음에 단단히 붙들렸고, 엔진은 움직이지 않았으며, 에번스 곶에서 북쪽을 향해 표류를 시작하여 맥머도 해협을 빠져나가 로스해로 들어갔고, 마지막에는 남극해로 나아갔다. 에번스 곶에서는 10명의 대원이 고립된 채 남겨졌다. 《오로라호》는 96년 2월 12일 얼음에서 벗어나 뉴질랜드를 향해 4월 2일에 도착했다34.
임시방편
매킨토시는 《오로라호》를 대원들의 주된 생활 공간으로 사용할 생각이었으므로, 육상 부대의 개인 소지품, 식량, 장비와 연료는 아직 배에 실린 채였다. 섀클턴 본대를 위해 보급소에 둘 식량은 이미 하역되어 있었지만35, 10명의 육상 부대는 "의복과 자기 가방뿐인" 상태로 남겨진 셈이었다35. 배의 행방은 알 수 없었고, 언제 돌아올지도 알 수 없었으며, 생존과 보급소 설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그들의 독창성과 문제 해결 능력이 시험받게 되었다.
이때 매킨토시는 그 상황을 "우리는 여기서 2년 동안 지원 없이 머무를 가능성에 직면해 있다. 그 이전에 구조를 기대할 수 없으므로, 지금 가진 것을 보존하고 절약해야 한다. 구할 수 있는 대용품도 찾아 적용해야 한다"라고 요약해 두었다36. 가장 먼저 의지한 것은 그 이전에 스콧이나 섀클턴의 대원들이 남겨 둔 식량과 물자였다36. 이 물자는 상당한 양이 있었고, 의복, 신발, 장비를 임시로 만들 수 있게 해 주었다. 또한 물개의 살코기와 지방을 식량과 연료의 추가 자원으로 사용했다. "조이스의 유명한 양복점"이 스콧 원정대가 버리고 간 큰 범포로 의복을 만들어 냈다36. 어니스트 와일드는 톱밥, 홍차, 커피, 그리고 말린 소량의 약초를 배합하여 "햇 포인트 믹스처"라는 상표를 붙인 담배를 만들었다36. 이러한 수단으로 2년째 시즌에 보급소를 설치할 썰매 여행의 장비를 갖추어 갔다. 8월 말, 매킨토시는 그 일지에 겨울 동안 작업이 완성되었음을 기록하고, "내일 우리는 햇 포인트를 향해 출발한다"라고 글을 맺었다37.
3년차 보급소 설치 시즌 1915년–1916년
마운트 호프로의 여정
2년차 시즌의 작업은 3단계로 계획되어 있었다. 먼저 총량 3,800파운드 (1,700 kg)의 물자를 에번스 곶에서 핫 포인트로 옮기는 것이었다38. 다음 단계는 이 물자를 핫 포인트에서 민나 블러프의 베이스 보급 지점까지 운반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쪽으로의 행군을 시작하여 남위 80도 지점의 보급소를 보강하고, 새로 남위 81도, 82도, 83도, 그리고 베어드모어 빙하 기슭에 가까운 남위 83도 30분의 마운트 호프에 보급소를 설치하는 것이었다39.
썰매 3대로 운반하는 작업에는 9명이 팀을 이루어 맡았다. 첫 단계인 해빙을 건너 핫 포인트로 운반하는 작업은 1915년 9월 1일에 시작되었고, 그 달 말에 특별한 문제 없이 끝났다38. 제2단계는 핫 포인트와 민나 블러프 사이를 오가며 짐을 나르는 것이었는데, 좋지 않은 날씨, 어려운 빙붕 표면, 그리고 매킨토시와 조이스 사이의 방법을 둘러싼 의견 차이 등 문제가 많았다40. 이때 매킨토시는 사람의 힘으로 썰매를 끄는 방식을 선호했고, 조이스는 개 4마리를 사용하기를 원했다. 전년 겨울을 견딘 개 6마리 가운데 2마리는 임신 중이어서 쓸 수 없었기 때문에 4마리만 사용할 수 있었다41. 매킨토시는 조이스가 원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을 허락했고, 6명의 대원이 개들을 앞에서 이끌도록 했다. 매킨토시는 와일드, 스펜서 스미스와 함께 사람의 힘으로 썰매를 끄는 작업을 계속했다40. 운반할 수 있었던 짐의 양과 사람들의 피로 정도를 보면, 조이스가 주장한 방법이 효율적이었음이 입증되었다42. 민나 블러프의 베이스 보급소는 12월 28일까지 완성되었다42.
1916년 1월 1일 마운트 호프를 향한 본격적인 여정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프리머스 스토브가 고장 나, 코프, 잭, 게이즈 세 사람은 에번스 곶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43. 에번스 곶에서는 스티븐스가 홀로 기다리고 있었다. 과학자인 스티븐스는 기상 관측과 배가 돌아올 때의 감시를 위해 기지에 남아 있었다44. 남은 6명은 남쪽을 향해 썰매 여행을 시작했지만, 곧 스펜서 스미스가 쇠약해졌다. 매킨토시는 무릎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다45. 그들은 고생하면서도 전진하여 보급소를 설치했고, 자신들은 최소한의 식량으로 버텼지만, 조이스의 주장에 따라 개들에게는 충분히 먹였다. 조이스는 "개들은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다. 우리의 목숨이 그들에게 달려 있다"고 말하곤 했다46. 마운트 호프에 가까워지자 스펜서 스미스가 쓰러져 걸을 수 없게 되었다47. 다른 대원들은 스펜서 스미스를 작은 텍트에 홀로 남겨 두고, 마운트 호프의 마지막 보급소까지 남은 거리를 나아가, 1916년 1월 26일에 이를 완료했다. 어니스트 와일드는 웨델해에서 섀클턴과 함께 대륙을 횡단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형 프랭크 와일드에게 보내는 편지를 남겼다48.
귀환
대원들은 1월 27일에 귀로에 올랐고, 29일에는 스펜서 스미스를 거두었다. 스펜서 스미스는 이때까지 육체적으로 자립할 수 없는 상태였고, 썰매 위에 실어 운반할 수밖에 없었다49. 매킨토시도 곧 썰매를 끌 수 없게 되었다. 썰매 옆에서 비틀거리며 걸을 뿐이었다. 이때까지 "사실상"의 대원 지휘권은 조이스와 리처즈에게 넘어가 있었다50. 조이스는 이 상황에 대해 "나는 이토록 충격적인 상황을 이전에는 알지 못했다. 내가 겪은 여행 가운데 가장 힘든 견인 중 하나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가능한 한 빠른 속도로 비틀거리며 걷는 것뿐이었다"고 요약했다50.
대원들은 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순조롭게 나아가고 있었고, 2월 17일에는 블러프 디포까지 10마일 (16 km) 거리에 이르렀다. 여기서 눈보라에 가로막혔다50. 5일 동안 텐트에 갇혀 있었고, 그 사이 식량이 떨어졌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다음 날 텐트를 나섰지만, 매킨토시와 스펜서 스미스는 더 이상 나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조이스, 리처즈, 헤이워드가 눈보라를 뚫고 썰매를 끌고 보급소까지 갔고, 움직일 수 없는 두 사람은 텐트 안에서 와일드의 보살핌에 맡겨졌다51. 이 왕복 20마일 (32 km)의 여정에 1주일이 걸렸다. 그들은 동료들을 유지하기 위해 식량과 연료를 가지고 되돌아왔고, 귀환 여정이 재개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매킨토시도 스펜서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썰매 위에 실렸고, 헤이워드까지 쓰러졌다52. 아직 걸을 수 있었던 3명은 병자 3명을 실은 썰매를 끌기에는 체력이 약해져 있었다. 3월 8일, 매킨토시는 혼자 텐트에 남고, 나머지 두 사람이 헤이워드를 핫 포인트까지 데려갈 것을 제안했다. 그 하루 뒤 스펜서 스미스가 죽었다. 완전히 체력을 소진하고 괴혈병에 걸려 있었다. 스펜서 스미스는 얼음 속에 묻혔다. 조이스와 와일드가 헤이워드를 끌고 3월 11일 핫 포인트에 도착했고, 다시 매킨토시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3월 16일까지 나머지 5명 전원이 핫 포인트에 도착했다52.
1915년 9월 1일 에번스 곶을 떠나 짐 나르기를 시작한 때부터 생존자들이 핫 포인트로 돌아오기까지 198일이 지나 있었다. 당시까지의 원정대가 소비한 시간으로는 가장 긴 썰매 여행이 되었다53.
매킨토시와 헤이워드의 죽음
생존한 5명은 바다표범 고기를 먹으며 천천히 체력을 회복했다. 얼음이 너무 두꺼워 에번스 곶까지의 마지막 여정이 위험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식량과 환경의 단조로움이 지루함을 주었다. 5월 8일, 매킨토시가 헤이워드와 함께 얼음을 건너 에번스 곶까지 가는 위험을 감수하겠다고 선언했다. 동료들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두 사람은 출발했고, 1시간도 되지 않아 눈보라 속에서 시야에서 사라졌다. 폭풍이 가라앉은 뒤 나머지 3명이 두 사람을 찾았지만, 갈라진 얼음 가장자리까지 이어지는 발자국만을 발견했다. 매킨토시와 헤이워드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얇아진 얼음 사이로 빠졌거나, 떠다니는 얼음에 실려 바다 위로 떠내려갔을 것이었다. 리처즈, 조이스, 와일드는 7월 15일까지 기다린 뒤 에번스 곶을 향해 출발했다. 그곳에서 스티븐스, 코프, 잭, 게이즈와 재회할 수 있었다. 이날은 극야 속에서 부분월식이 일어난 날이었고, 여정을 비추던 빛이 어두워졌다5455.
구조
오로라호가 1916년 4월 뉴질랜드에 도착한 뒤, 스텐하우스는 남극에서 고립된 대원들을 구하기 위해 돌아가기 전에 오로라호를 수리하고 재장비하기 위한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 임무는 어렵다는 것이 드러났다. 인듀어런스호가 1914년 12월 사우스조지아를 떠난 이후 섀클턴으로부터 소식이 없었고, 원정대의 두 부대 모두에 구조대 파견이 필요하다고 여겨졌다56. 그러나 제국 남극 횡단 탐험대의 자금은 완전히 바닥나 있었고, 다른 명확한 자금원도 없었다. 오로라호가 오스트레일리아를 떠날 때의 혼란스러운 재정 상황을 생각하면, 민간 기부자를 찾는 것도 어려웠다56. 결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영국 정부가 공동으로 오로라호의 재장비 자금을 대기로 합의했지만, 그 합동위원회는 구조 원정의 지배권을 모두 가질 것을 주장했다56.
5월 31일, 섀클턴이 포클랜드 제도에 도착하여, 웨델해에서 인듀어런스호를 잃은 뒤의 탈출 행적이 드러났다56. 섀클턴의 최우선 과제는 코끼리섬에 남겨 둔 웨델해 부대의 나머지를 구하러 가는 것이었고, 뉴질랜드에 도착한 것은 12월 초였다. 섀클턴이 나타난 것은 너무 늦어서, 로스해 지대의 구조대 조직에 개입할 수 없었고, 합동위원회는 존 킹 데이비스를 원정대장으로 지명하고, 스텐하우스와 오로라호의 전직 사관들을 해임했다57. 데이비스는 모슨이 이끈 오스트레일리아 남극 원정대에 참가한 베테랑이었는데, 1914년 섀클턴이 인듀어런스호 또는 오로라호의 선장을 제안했을 때 이를 거절한 바 있었다5859. 섀클턴은 12월 20일 배가 출항할 때 형식상 정원 외 사관으로 동행하는 것을 허락받았다57. 1917년 1월 10일 오로라호가 에번스 곶에 도착했고, 생존자들은 섀클턴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놀랐다. 이때 처음으로 자신들의 노력이 헛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다음 1주일 동안 매킨토시와 헤이워드의 시신을 찾았지만 헛수고로 끝난 뒤, 오로라호는 육상 부대의 생존자 7명을 태우고 북쪽의 뉴질랜드로 향했다60.
원정 이후
디스커버리 원정과 테라노바 원정의 오두막은 지금도 남아 있으며, 남극문화유산 트러스트와 뉴질랜드 정부가 보존하고 있다. 에번스 곶 오두막 안, 리처즈의 잠자리에 가까운 벽에는 원정 중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지금도 판독할 수 있다. 그러나 오두막 전체가 썩어 가는 위험에 놓여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61.
오로라호는 로스 해에서 마지막으로 돌아왔으나, 그 뒤 1년도 버티지 못했다. 섀클턴이 1만 파운드에 매각했고62, 새 임무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남아메리카 사이에서 석탄을 운송하는 것이었다. 1918년 1월 2일 무렵 오로라호는 태평양에서 실종되었다. 폭풍으로 좌초했거나 적국의 습격선에 격침되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승무원 중에는 로스 해 지대에 참가했던 제임스 페이튼이 있었으며, 이때도 갑판장을 맡고 있었다63. 아니스트 와일드 역시 제1차 세계대전의 희생자가 되었다. 지중해에서 영국 해군에 복무하던 1918년 3월 10일, 몰타에서 티푸스로 사망했다64.
1923년 7월 4일, 조이스와 리처즈는 두 번째 시즌 보급소 설치 여정에서 보여준 용감하고 인명을 구한 행위에 대해 영국 국왕 조지 5세로부터 알버트 메달을 받았다. 와일드와 빅터 헤이워드도 사후에 같은 훈장을 받았다. 생존자 대부분은 이후 오랫동안 성공적인 경력을 이어 갔다. 젊은 무선 기사 라이오넬 훅은 아말가메이티드 와이어리스 오스트레일리아에 입사하여 수많은 기술적 발명을 이루었다. 1945년에는 이 회사의 사장이 되었고, 1962년에는 회장이 되었다. 1957년에는 산업에 대한 공로로 기사 작위를 받았다65. 살아남은 개 네 마리 가운데 콘은 구조되기 전에 다른 개와의 싸움에서 죽었다. 나머지 개들인 오스카, 가너, 타우저는 배편으로 뉴질랜드에 돌아가 웰링턴 동물원에 수용되었으며, 오스카는 25세까지 살았다고 전해진다66. 딕 리처즈는 만년에 이 원정대의 마지막 생존자가 되었다67. 그는 원정에 참가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으며, 헛된 결과로 끝난 싸움도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 정신이 이룬 무엇이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68.
참고 문헌
- Bechervaise, John (1981). “John King Davis biography”. Australian Dictionary of National Biography. Melbourne University Press. 2008년 2월 5일 확인.
- Bickel, Lennard (2001). 'Shackleton's Forgotten Men: The Untold Tale of an Antarctic Tragedy. London: Pimlico Press. ISBN 0-7126-6807-1
- Fisher, Marjorie and James (1957). Shackleton. London: James Barrie Books
- Griggs, Kim (2001년 12월 7일). “Scott's hut needs urgent repair”. British Broadcasting Corporation. 2008년 2월 5일 확인.
- Haddelsey, Stephen (2008). Ice Captain: The Life of J.R. Stonehouse. Stroud, Gloucestershire: The History Press. ISBN 978-0-7509-4348-2
- Huntford, Roland (1985). Shackleton. London: Hodder & Stoughton. ISBN 0-340-25007-0
- McElrea, Richard (2004). Polar Castaways: The Ross Sea Party of Sir Ernest Shackleton, 1914–17. Montreal: McGill-Queen's University Press. ISBN 0-7735-2825-3
- Richards, Richard W. (2002). The Ross Sea Shore Party 1914–17. Norwich: The Erskine Press. ISBN 1-85297-077-4
- Shackleton, Ernest (1919). South. London: William Heinemann
- Shackleton, Ernest (1911). The Heart of the Antarctic. London: William Heinemann
- Tyler-Lewis, Kelly (2007). The Lost Men: The Harrowing Saga of Shackleton's Ross Sea Party. London: Bloomsbury Publishing. ISBN 978-0-7475-7972-4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