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인권
도인권(都寅權, 1880년 1월 17일 ~ 1969년 2월 28일)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군사국장, 상해거류민단장을 지낸 독립운동가이자 감리교 목사, 교육가이다. 1911년 안악사건으로 6년간 옥고를 치렀다. 상하이와 시베리아 등지에서 독립운동과 선교활동에 힘썼다. 광복 후에는 황해도 옹진교회에 있다가 6·25전쟁이 일어나자 제주도로 피란 가서 목회하였고 제주선교의 아버지로 불린다. 김구의 비서이기도 했으며, 의형제를 맺고 평양 3.1운동 주도역할도 하였다.
출생~사망 1880년 1월 17일 ~ 1969년 2월 28일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1:49
문서 정보
- 출생 ~ 사망
- 1880년 1월 17일 ~ 1969년 2월 28일
- 출생
- 1880년 1월 17일
- 사망
- 1969년 2월 28일
- 성별
- 남성
- 국적
- 대한민국
- 경력
-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사국장, 상해거류민단장
- 직업
- 독립운동가, 목사, 교육가
- 종교
- 감리교
- 위치
- 38.8571, 125.4220
도인권(都寅權, 1880년 1월 17일 ~ 1969년 2월 28일)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군사국장, 상해거류민단장을 지낸 독립운동가이자 감리교 목사, 교육가이다.1 1911년 안악사건으로 6년간 옥고를 치렀다. 상하이와 시베리아 등지에서 독립운동과 선교활동에 힘썼다. 광복 후에는 황해도 옹진교회에 있다가 6·25전쟁이 일어나자 제주도로 피란 가서 목회하였고 제주선교의 아버지로 불린다.2 김구의 비서이기도 했으며, 의형제를 맺고 평양 3.1운동 주도역할도 하였다.3
생애
도인권은 1880년 1월 17일 평안남도 용강(龍岡)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엄격하고 예절 있는 생활교육과 한문교육을 받았다. 불행하게도 그가 한참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자라야 할 10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버지를 잃고 난 도인권은 14세에 평양으로 이주를 하였으며, 이때 마을 이장이 마을 장으로 장례예식을 거행해야 한다는 여론을 수렴하여 장례예식을 성대하게 거행했다. 1904년 대한제국 때에 무관학교 군사특별과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교관으로 임명되었으나, 1907년 군대해산이 되자 교육운동에 투신하였다. 용강에 충일학교를 설립하고 황해도 재령(載寧)의 문창학교와 안악(安岳)의 양산학교에서 각각 교직생활을 하였다. 여기서 김구(金九)와 만나면서 독립운동에 더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되었다. 1910년 국권피탈이 되자 기독교에 귀의, 장로교회 선교사 밀러(F.S. Miller, 한국명 민노라)에게 세례를 받았다. 1910년 12월 안중근(安重根)의 종제(從弟) 명근(明根)의 독립운동자금모금사건이 탄로되자 김구 및 해서교육총회 지도자들과 함께 투옥되었다. 이 때 10년 형을 언도받고 6년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일본 경찰관이 불당(佛堂)을 건축하여 입불식(入佛式)을 거행하면서 모든 죄수들로 하여금 분향배례(焚香拜禮)하게 한 적이 있는데 그 혼자만 예수를 믿는다고 이에 불응을 하여 수없이 구타를 당하기도 하였다. 가출옥 조처에도 출옥시키지 않으면 나가지 않겠다고 고집하여 형기를 다 채우고서야 풀려났다. 이를 김구는 <백범일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람됨이 민활하고 강직하다. 10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노역하는 중에 야소를 돈돈히 믿었는데 왜놈 교회사(敎誨師)가 일요일 불상 앞에 각 수인(囚人)으로 하여금 머리를 숙이고 예불(禮佛)하도록 명하니 수인들이 마음속으로는 천황(天皇) 급살을 빌면서도 겉으로는 머리를 숙였으되 수백 명 가운데 도인권 한 사람만이 머리를 까딱 안 하고 앉았다. 간수가 질문을 해도 도는 자기는 기독교 신자 이므로 우상에 절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왜놈들이 분이 나서 도인권의 머리를 억지로 타 누르거니, 도는 눌리지 않으려거니 대소동이 일어났다. 도는 <일본 국법에도 종교의 자유가 있고 감옥 법에도 수인(囚人)들이 불교만 신앙하라는 조문이 없는데 어디에 근거하여 이같이 무례한가 ? 일본인의 안목으로 보아 도인권 이가 죄인이라 하나, 신의 안목으로는 일본인이 죄인이 될지도 모른다” 하여 큰 시비가 생기어서 급기야 교회사(敎誨時)에 배불(拜佛)하는 일 만큼은 수인(囚人) 자유에 맡긴다는 전옥의 교사가 있었다. 그 후에 소위 가출옥을 시키는 데도 <나의 죄가 없는 것을 지금에야 깨달았거든 판결을 취소하고 아주 풀어 줄 것이니 가출옥이란 가(假) 자가 정신에 상쾌치 못하니 기한까지 있다가 나간다” 한즉 왜놈도 어찌할 줄을 모르고 기한을 채워서 방면(放免)을 하였다.>
출감한 뒤에 평양교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18년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그후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군사국장, 무관학교 교관·학도대장, 임시의정원 부의장, 상해거류민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21년 고려혁명위원회에 가입하여 시베리아로 가서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고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2년 10월부터 남감리교회에 속하여 외수청(外水淸)구역을 담임하는 것으로 교역을 시작하여 시베리아지방의 선교사업에 투신하였다. 1929년 소련 공산정권의 종교 핍박을 피해 교인들과 함께 중국 훈춘의 동흥진으로 피하여 여기서 6개의 교회와 5개의 학교를 설립하는 한편 동흥진교회의 담임으로 시무하면서 영육상으로 큰 성과를 얻었다. 1931년 만주사변 당시에는 비적들에게 잡혀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가 석방된 적도 있다. 금일(今日), 명일(明日)하고 죽음을 기다리던 중 금월 20일에 토벌대(討伐隊)가 내주(來駐)됨을 따라 비적(匪賊)은 도산(逃散) 혹은 귀순(歸順)함으로 안도(安堵)를 득(得)케 되어 교회에서는 도인권 목사를 구해준 토벌대장인 다케모도(竹本) 헌병대장에게 감사장을 보낸 바도 있다. 또 일본 감리교 신자로서 훈춘 영사관 부영사 기다기리에게 파괴된 예배당 재건비 60만 원을 받아 교회 성전까지 재건축하였다.
도인권 목사가 동흥진을 떠나는 전별상황을 〈조선감리회보〉는 보도하고 있는데, 도 목사는 만주사변 당시 비적에게 잡혀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환란과 핍박중에서도 꾸준히 구령사업에 분투하여 그간에 7, 8백 명이나 되는 신자를 얻었다고 한다. 교육 방면에도 열심히 하였는데, 특히 동흥학교는 건전히 유지 발전하여 많은 졸업생을 내었으며 지금 재적생도 수백 명에 달했다. 실로 도 목사의 10년간 사업을 영육상 큰 성적을 보였다고 전한다. 그를 떠나보내는 동흥진 형제들의 상황을 〈감리회보〉는 이렇게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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