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현종
당 현종 이융기(唐玄宗 李隆基, 685년 9월 8일 ~ 762년 5월 3일)는 중국 당나라의 제6대 황제이다. 별호는 당 명황(唐明皇)이며, 당 태종 이세민 이후 개원성세로 불리는 왕조의 재번영을 이끌기도 했으나 동시에 안사의 난이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했다. 당 예종 이단의 3남이며, 어머니는 소성황후 두씨이다.
출생~사망 685년 9월 8일 ~ 762년 5월 3일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후 2:10
문서 정보
- 출생 ~ 사망
- 685년 9월 8일 ~ 762년 5월 3일
- 재위
- 756년 8월 12일 ~ 762년 5월 3일 (양력), 〈756년 7월 12일 ~ 762년 4월 5일〉
- 전임
- 예종(睿宗)
- 후임
- 숙종
- 재위
- 712년 9월 8일 ~ 756년 8월 12일 (양력), 〈712년 8월 3일 ~ 756년 7월 12일〉
- 즉위식
- 연화 원년(712년) 음력 8월 3일
- 전임
- 예종(睿宗)
- 후임
- 숙종(肅宗)
- 재위
- 710년 7월 28일 ~ 712년 9월 8일 (양력), 〈710년 6월 27일 ~ 712년 8월 3일〉
- 즉위식
- 경룡 4년(710년) 음력 6월 27일
- 전임
- 상제(殤帝) 이중무(李重茂)
- 후임
- 폐태자(廢太子) 이영(李瑛)
- 재위
- 710년 7월 22일 ~ 710년 7월 28일 (양력), 〈710년 6월 21일 ~ 710년 6월 27일〉
- 재위
- 693년 1월 14일 ~ 710년 7월 22일 (양력), 〈693년 납월 3일 ~ 710년 6월 21일〉
- 재위
- 687년 2월 19일 ~ 693년 1월 14일 (양력), 〈687년 윤 1월 2일 ~ 693년 납월 3일〉
- 휘
- 이융기(李隆基)
- 묘호
- 현종(玄宗)
- 시호
- 지도대성대명효황제, (至道大聖大明孝皇帝)
- 존호
- 개원천지대보성문신무증도효덕황제, (開元天地大寶聖文神武證道孝德皇帝)
- 능호
- 태릉(泰陵)
- 출생일
- 수공(垂拱) 원년 8월 5일, (685년 9월 8일)
- 사망일
- 보응(寶應) 원년 4월 5일, (762년 5월 3일) (76세)
- 부친
- 예종(睿宗) 이단(李旦)
- 모친
- 소성황후(昭成皇后) 두씨(竇氏)
- 배우자
- 폐후(廢后) 왕씨(王氏), 정순황후(貞順皇后) 무씨(武氏), 원헌황후(元獻皇后) 양씨(楊氏)
- 위치
- 34.3083, 108.8583
목차
당 현종 이융기(唐玄宗 李隆基, 685년 9월 8일(음력 8월 5일) ~ 762년 5월 3일(음력 4월 5일))는 중국 당나라의 제6대 황제이다. 별호는 당 명황(唐明皇)이며, 당 태종 이세민 이후 개원성세로 불리는 왕조의 재번영을 이끌기도 했으나 동시에 안사의 난이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했다.
당 예종 이단의 3남이며, 어머니는 소성황후 두씨이다.
어린 시절
이융기는 처음에 초왕(楚王)으로 책봉되었으나, 후에 임치왕(臨淄王)으로 책봉되었다. 일찍이 별가 등 요직을 맡았으나, 당시 황후인 큰어머니 황후 위씨에게 모함을 받아 수도 장안으로 소환되었다. 710년, 위씨가 딸 안락공주와 결탁하여 황제인 중종 이현을 죽이자, 이것을 알아챈 이융기는 우림군 병사를 소집, 궁중으로 들어가 위씨와 안락공주를 죽이고, 이어 위씨 가문 모두를 몰살시켰다. 또한 자신의 할머니인 성신황제 무씨의 집안 무씨 일가까지 몰살시켰다.
이어, 고모 태평공주에게 아버지 예종 이단의 복위 주도 운동을 맡아달라 하였고, 그로 인해 이단은 다시 황제의 자리에 앉았고, 이융기는 평왕(平王)에 책봉되었다가 큰형인 이헌의 양보로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712년 9월 8일, 이때는 이융기의 27번째 생일이었다. 예종 이단은 황태자 이융기에게 황제의 위를 물려주고 연호를 선천(先天)이라 하니, 이가 당나라 제6대 황제인 현종이다.
현종 이융기가 즉위했으나, 그의 고모 태평공주는 황위를 노리고 있었다. 태평공주는 은밀히 여러 번 이융기를 독살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며, 713년에 이융기는 태평공주와 그 일당을 모두 죽여버렸다.
개원의 치
유능한 재상들의 보좌
현종 이융기는 1년 뒤 713년에 연호를 개원(開元)으로 바꾸고, 정치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현종을 섬기던 관리중에는 유능한 재상들이 많았는데, 요숭(姚嵩), 한휴, 송경, 장구령, 소숭 등이었다. 이들 모두 각각의 능력이 출중하고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지극하였다 한다. 그중에도 요숭의 공이 가장 높아, 이융기는 그를 승상에 임명하기도 했다. 요숭은 그에게 가난의 퇴치를 포함한 치국의 10가지 조건을 제시하였고, 이융기는 이것을 모두 수용하였다. 한휴는 언제나 이융기에게 직언을 올렸다. 하지만 소숭은 이융기에게 언제나 순종적이고 아첨을 하였다 한다.
애민정치
고 고우영 화백의 《만화 십팔사략》(두산동아)에 따르면, 이융기는 "짐이 마르더라도, 천하와 백성들이 살찌면 아무 여한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융기가 재위 초기에 얼마나 민생위주의 에 전력을 쏟았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융기는 중앙의 유능한 관리를 지방에 도독이나 자사로 파견하였고, 적성에 맞지 않는 관리는 모두 교체하였다고 전해진다. 심지어는 나라에 가뭄이 돌자, 황궁의 을 배고픈 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어진 정치를 행하였고, 과 인척을 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여 정치가 문란해질 위험을 미리 막았다. 또한 이융기는 과 의 수를 줄이고, 권력가들을 제압하는 한편, 조정을 정비하여 상벌을 엄정히 나누어 주어서 이후 혼란스러웠던 정치 상황을 안정시켰다. 이융기의 훌륭한 덕분에 당나라의 국력은 당연히 강성해졌으며, 이 이룩한 태평성세에 버금가는 치세를 하여 후세 사람들은 이를 당시의 연호인 개원(開元)을 따 '(治)'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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