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근
권근(權近, 1352년~1409년 2월 14일)은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문신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진(晉), 자는 가원(可遠)·사숙(思淑), 호는 양촌(陽村),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색, 정몽주의 문인이다.
출생~사망 1352년 ~ 1409년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1:54
권근(權近, 1352년~1409년 2월 14일)은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문신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진(晉), 자는 가원(可遠)·사숙(思淑), 호는 양촌(陽村), 시호는 문충(文忠)이다.12 이색, 정몽주의 문인이다.
생애
과거급제
일찍이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그의 수제자인 정몽주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1368년(공민왕 17) 17세에 성균시에 합격하고, 1369년(공민왕 18년) 1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검열이 되었다. 1374년(공민왕 23) 성균관 직강(直講), 예문관 응교(應敎)에 임명되었으며, 공민왕이 죽자 정몽주·정도전 등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배원친명(排元親明)을 주장하였다.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와 성균관대사성, 지신사(知申事) 등을 거쳐, 1388년(창왕 1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이은(李垠) 등을 뽑았다.
유배
1389년(창왕 2년)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使)에 이르러, 문하평리 윤승순과 함께 사신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는데, 그때 공양왕이 즉위하자 명나라에서 가져온 문서의 글이 원인이 되어 유배되었다. 그때 이림(李琳, 昌王의 외조부)의 일파로 몰려 극형을 받게 되었으나 이성계의 구원으로 모면하고, 이색의 일파와 같이 청주옥(淸州獄)에 갇혔다가 마침 수해로 용서를 받고 익주(益州)에 있으면서 《입학도설》을 저술하였다.
새왕조 참여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1393년(태조2) 정총(鄭摠)과 함께 정릉(定陵)의 비문을 짓고 중추원사가 되었다. 1396년 태조는 이천시 율면 산성리 정문말에 권근을 찾아와 임금님 바위에서 권근과 정치적인 담론을 하였고, 조선왕조에 협조를 거부하던 권근은 절의를 굽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새왕조에 협력하게 되었다.3
표전 문제
1396년(태조 5) 명나라 태조가 자기에게 바치는 글인 찬표를 잘못 썼다 하여 그 글을 쓴 정도전을 잡아들이라고 할 때, 정도전을 대신해서 자진하여 가서 해명을 잘 하여 극진한 예우를 받고 돌아왔다. 이때 정도전을 대신하여 표문의 작성 참여자로서 권근과 노인도(盧仁度, ?~?) 등을 파견하였고, 조선의 입장을 확인한 홍무제는 약항, , 권근, 인도 등 4명을 억류하고 나머지는 풀어주었다. 결국 이 가운데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고 언행이 신중하였던 권근만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나머지는 명에서 처형 당하였다. 는 그 해에 세상을 떠나고 태조는 왕비의 장례를 치른다. 권근은 귀국한 뒤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 화산군(花山君)에 봉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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