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부
국민부(國民府)는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단체, 군정부(軍政府)이다. 1929년 4월 만주 자치지역에서 정의부 중심의 전민족유일당협의회파가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을 모체로 하여 국민부를 결성하였다.
설립 1929년 4월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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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립
- 1929년 4월
목차
국민부(國民府)는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단체, 군정부(軍政府)이다. 1929년 4월 만주 자치지역에서 정의부 중심의 전민족유일당협의회파가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을 모체로 하여 국민부를 결성하였다.
배경
유일당 촉성운동
1928년 무렵 만주 지역에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등 3부가 정립된 가운데, 정의부가 재만 독립운동단체를 영도하기 위해 유일당 촉성운동을 주창하였다. 1928년 2월 3부의 간부들이 연합회의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1928년 5월 신민부와 참의부 외 민족·공산주의를 망라한 재만 18개 단체 대표가 모여 회의가 진행되었으나 기성단체의 부정을 주장하는 '촉성회파'와 기성단체의 본위를 주장하는 '협의회파'로 분열되었다. 회의의 결과, 촉성회 측은 민족유일당 '촉성회조직동맹'을 조직하였고, 협의회 측은 '재만운동단체 협의회'를 규약하였다.
촉성회파 (혁신의회)
이에 1928년 8월 정의부를 이탈한 일부가 촉성회에 가담하여 길림성 내 김응섭의 집에서 김동삼·이종건·김상덕·배활산 등과 유일당촉성의 조직과 선전을 위하여 남·북만주 각지에서 구역을 분담하여 적극 노력할 것을 결의하였다. 11월 중순 반석현 호란양창자(呼蘭梁廠子)에서 민족유일당의 이름으로 동맹규약을 발표함과 동시에 맹원(盟員)의 모집에 노력하였다. 이에 신민부의 군정파와 참의부가 촉성회에 투합할 것을 결정함으로써 그해 12월 하순 정의부 탈퇴파의 가담과 더불어 길림에 모여 회합을 갖고, 신민부 군정파의 주창에 따라 양부는 해체를 선언하고 임시 과도적 기관으로 '혁신의회'를 조직1하고, 주요 과업2을 정하였다. 그리고 한교(韓僑)의 자치를 위한 잠정 행정구역으로 전 참의부의 관할구역을 남구(南區), 재야혁명당 소재 관할구역을 중구(中區), 전 신민부의 관할구역을 북구((北區)로 나누어 통합하기로 하였다.
한편 기성회와도 의견의 일치를 보게 됨으로써 민족유일독립당 재만'책진회'를 조직하고, 새로운 진용으로 회장에 김동삼 등 집행위원회3를 구성하여 유일당의 촉성에 주력하기로 의결4하였다.
- 촉성회의 소멸
그러나 기한인 1929년 5월 이전까지 책진회가 군정부를 조직하지 못해 김좌진, 김시야 등은 북만주로, 이청천은 오상(五常)현으로 김희산, 박희곤(朴希坤), 이백파 등은 남만주로, 각자의 근거지로 돌아간 후 일부가 일본 관헌에 체포됨으로써 촉성회는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이후 책진회는 정의부에서 탈퇴하여 김동삼, 김상덕, 김원식 등에 의해 근근히 유지되었다.
김좌진 등은 원래 신민부의 근거지였던 중동선 석두하자(石頭河子)에서 동지를 규합하고 민족단체를 조성하면서 1929년 8월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조직하면서 세력을 만회하는 데 주력하였다. 한족총연합회는 순 국수파인 김좌진 등과 무정부주의자의 일파인 남대하(南大廈)를 비롯하여 국내 인사들이 제휴한 단체로 중동선 일대를 관할할 수 있는 영안현 산시(山市) 역전에 본부를 두고 주석에 이 취임하였다. 그러나 1930년 1월 24일 김좌진이 반대파인 재중국청년동맹 일파인 공산주의자 청년에게 암살됨으로써 분열하여 등에 의해 '한족자치연합회'로 개칭되었다가, 그해 7월 , , 민무(閔武), (安勳), , , (李章寧) 등이 추진하던 에 합류함으로써 북만주 유일독립당의 조직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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