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전투
930년 음력 정월 고창군(지금의 안동) 병산에 진을 친 고려 태조의 군대가 석산에 진을 친 견훤의 후백제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로, 후백제군 8천여 명이 죽고 이후 경상도 동북부와 동해안 110여 성이 고려에 귀부하였다.
시작 930년 2월 22일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1:12
상세 타임라인
개요
고창 전투는 930년(고려 태조 13) 음력 정월 고창군(古昌郡,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에서 고려 태조 왕건의 군대가 후백제 견훤의 군대를 크게 이긴 전투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정월 병술일(21일, 양력 환산 2월 22일) 태조는 병산에, 견훤은 석산에 진을 치고 맞섰으며, 저녁까지 싸운 끝에 견훤이 패주하였다. 고려군은 후백제 시랑 김악을 사로잡고 8천여 명을 죽였다. 이 승리로 고려는 공산 전투 이후 내주었던 주도권을 되찾았다.
배경
공산 전투 승리 후 후백제는 경상도 일대로 세력을 넓혔다. 928년 강주(진주)를 장악하고 오어곡성을 함락하여 고려군 1천 명을 죽였으며, 929년 7월에는 견훤이 직접 갑병 5천을 이끌고 의성부를 공격해 고려를 충실히 따르던 성주 홍술을 전사시켰다. 태조는 홍술의 죽음을 듣고 "나의 좌우 손을 잃었다"며 통곡했다고 한다. 같은 해 12월 견훤은 교통의 요지인 고창군을 포위하였고, 태조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구원에 나섰다.
전개
930년 정월 태조는 고창군 병산에 진을 쳤고, 견훤은 500보 남짓 떨어진 석산에 진을 쳤다. 두 군대는 저녁까지 싸웠고 견훤이 패하여 달아났다. 고려군은 시랑 김악을 사로잡았고 죽은 후백제군이 8천여 명이었다(『고려사』). 같은 날 고창군에서는 견훤이 장수를 보내 순주성을 함락시키고 주민을 끌고 갔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태조는 곧 순주로 가서 성을 수리하고, 성을 지키지 못한 장군 원봉을 처벌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승리의 결정적 요인으로 고창 지역 호족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든다. 고창군 성주 김선평과 권행·장길은 고려 편에 서서 싸웠고, 태조는 정월 경인(25일) 김선평을 대광, 권행과 장길을 대상으로 삼아 포상하였다. 이들은 훗날 안동 김씨, 안동 권씨, 안동 장씨의 시조로 받들어졌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후백제」 항목은 이들이 신라 왕실에 우호적이던 지방관 출신 호족으로서, 경애왕을 죽게 한 견훤에 반감을 품고 고려에 협력했다고 설명한다.
결과
- 영안(안동 풍산 일대), 하곡, 직명, 송생(청송) 등 30여 군현이 잇달아 고려에 항복하였다.
- 2월에는 태조가 신라에 사신을 보내 승전을 알렸고, 경순왕이 답례 사신을 보내 만나기를 청하였다. 이때 신라 동쪽 바닷가의 주군 부락이 모두 항복하여 명주(강릉)에서 흥례부(울산)에 이르는 110여 성이 고려에 귀부하였다.
- 고창군은 안동부로 승격되었다.
- 931년 2월 태조는 신라 왕경을 방문하여 수십 일 머물렀는데, 군사들이 조금도 범법하지 않자 왕경 사람들이 "견훤이 왔을 때는 승냥이와 범을 만난 것 같더니, 왕공이 오니 부모를 본 것 같다"고 했다고 한다.
영향과 의의
고창 전투는 후삼국 쟁패의 흐름을 바꾼 전투로 평가된다. 후백제는 이후 934년 운주 전투에서도 패하여 운주 이북을 잃었고, 935년 왕실 내분으로 무너져 갔다. 고려는 이 승리로 경상도 북부와 동해안을 확보하여 신라를 사실상 자기 영향권 아래 두었고, 이는 935년 경순왕의 귀부로 이어졌다.
이설
병산과 석산의 정확한 위치는 확정되지 않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고창군을 지금의 안동시 와룡면 일대로 설명하며, 안동시 북쪽 일대를 전장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위키백과는 전투가 3~4일 이어졌다고 서술하나, 『고려사』는 하루 저녁까지의 전투로 기록하였다.
참고 자료
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1:12 · r144 · 문서 내용은 CC BY-SA 4.0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